가벼운 생활
프리랜서로 지내다 보니 회식이란 게 딱히 없는 삶이다. 주 3회 정도는 요가 수업을 마치고 요가 스승님과 함께 밥을 먹거나 주말엔 친구들과 함께 달리기하고 식사를 하는 정도다. 대부분 밥은 혼자 먹고 그것이 나의 ‘별일 없는’ 식사 모습이다. 그래서 ‘혼밥’이란 말을 의식하거나 굳이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요즘은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선 말도 하고 밥도 먹으려니 오히려 정신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더욱이 비건을 시작하고 나서 같이 밥을 먹는 자리가 쉽지 않다. 식당과 메뉴를 정할 때 비건인 나를 고려해야만 했다. 혼자서는 내키는 대로 먹으면 되지만, 함께 있을 때는 그렇지 못하니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비건을 하며 가장 어려운 점을 꼽으라면 대인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비건’이라는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들뜬 마음으로 주변에 알렸다. 시간이 지나 깨달은 건 ‘저 비건이라서요.’라는 한 마디로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질서가 재정비된다는 거다. 누군가는 나와 너 사이에 선을 긋고 나를 ‘다른’ 혹은 ‘어려운’ 사람으로 분류했을지도. 어디로 뭘 먹으러 가야 할지, 좁은 선택지에서 고민하는 얼굴들을 보며 ‘저 신경 쓰지 말고 가고 싶은데 가요.’라고 말하지만 정말 아무 데나 가도 나는 괜찮은 걸까, 혼자 되물어보기도 한다. 주목받기는 싫지만 조금의 배려는 받고 싶은 마음. 자발적 소수자의 삶엔 딜레마가 많다. 모두가 비건이 될 수 없겠지만 비건 문화가 널리 퍼지길 바란다. 그렇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아도 될 텐데.
때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비건이라 주목받지 않아도 되고 식사 자리에서 난처한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가끔 여러 사람과 일을 할 때가 있다. 한 번은 친구의 요청으로 디자인 작업을 함께 한 적이 있다. 그 작업이란 독립출판물을 만드는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의 콘텐츠를 편집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친구와 공유 파일도 주고받고 회의도 하니 작은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린 기분이었다. 한 게임 회사의 사내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던 일이라 책이 완성되고 나니 마무리 행사가 열리는 회사로 초대받았다.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사람들을 실물로 보니 반갑기도 하고 판교에 있는 회사는 이렇게 생겼구나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로의 발표와 소감을 나누고 행사가 끝날 때쯤 뒤풀이와 함께 치맥 얘기가 돌았다.
어쩌다 보니 우리도 자연스레 뒤풀이에 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앗, 치킨이라니 어쩌지.’ 하며 당황했으나, ‘치킨 집에 감자튀김 정돈 있겠지.’라 생각하며 치킨보다는 맥주에 전력을 기울여야겠다는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곳은 타이 레스토랑이었다. 내가 비건인걸 알고 있었던 프로그램 담당자가 회식 장소를 슬쩍 바꾼 듯했다. 친구와 프로그램의 진행자를 제외한 나머지 분들은 그날 처음 뵙는 분들이었고, 프로젝트에 중요한 인물도 아닌 나를 이렇게까지 신경 쓰다니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스무 명 남짓한 인원수가 긴 테이블에 꽉 채워 앉은 걸 보고 이런 회식자리가 얼마만이지 싶었다. 황송한 마음에 메뉴판을 펼쳤다. 그러나 화려한 음식들 사이에서 곧바로 난감해졌다. 동남아 음식에는 채소도 많고 비건의 선택지가 많을 줄 알았는데, 대부분의 요리에는 고기, 해산물이 빠지지 않았다. 흡사 채식처럼 보이는 메뉴도 굴 소스나 피시소스를 사용해서 비건이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게 아닌가. 민망하지만 주문받는 분과 일대일로 이야기를 나누며 새우와 계란, 굴 소스를 뺀 팟타이로 겨우 합의점을 찾았다. 타이 푸드로 완전 채식을 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육류와 해산물이 골고루 들어간 음식들이 긴 테이블을 푸짐하게 채웠다. 딱히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푸팟퐁 커리의 자태가 눈부시다는 건 인정했다. 그에 반해 나의 팟타이는 차림새가 굉장히 밋밋해 보이긴 했다. 음식에 동물성을 빼면 맛이 산뜻해진다. 보기완 다르게 고소하고 상큼함이 가득해 여러 맛이 잘 어우러진 팟타이를 먹으며 만족스러웠다. 그럼에도 서로 이 음식 저 음식 나누며 화기애애한 자리에서 혼자만 자기 요리를 갖고 묵묵히 먹고 있는 내가 무인도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회성 좋은 사람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 한두 마디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 채식하셨어요, 뭐까지 안 드세요?, 완전 채식이세요? 힘들진 않으세요?, 전 고기 없인 못 살아요, 이 친구는 저탄수 고단백 식단 중이라 고기 위주로 먹는 데 완전 반대네요.’ 등등. 이럴 때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할까 고민이 된다. 이 자리가 비거니즘을 강의하는 자리도 아니고 긴 설명은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맛있는 거 먹는 좋은 자리에서 불편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다. 이럴 땐 가볍게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화라 여기기로 했다. 단순 호기심에 의해 던져지는 질문과 관심도 그리 나쁘진 않으니. 주위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서로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비건이 의외로 할 만하다는 나의 말이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 남는 것만으로도 좋다.
어느 분은 회사 직원 중 비건인 독일인이 있는데 그가 평소 무슨 음식을 먹는지 나에게 얘기해주었다. 나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직장 동료를 끌어온 거다. 그렇다면 나도 그런 역할 정도를 맡는 건 기대해볼 수 있으려나. 오늘 처음 만나는 분들이 다른 자리에서 비건을 만났을 때 ‘아, 저 비건이랑 같이 회식해봤는데요.’라며 대화의 물꼬가 되는 역할. 비록 ‘혼자 회식자리에서 이것저것 빼고 밍밍하게 생긴 팟타이를 먹던데요?’라고 덧붙여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회식자리에서 조용히 묻어가고 싶었던 바람과 다르게, 식당 장소를 바꾼 장본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관심을 받아 부담스럽긴 했다. 하지만 불편한 질문을 받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안면부지의 독일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오늘 같은 자리가 비건과 함께 식사하는 경험을 나누는, 나름 의미 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론 논비건들 사이에서 괜히 움츠러들거나 미안해하지 않고 서로 공존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거라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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