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 Jul 14. 2022

카페의 조건

가벼운 생활 

집에서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날이 있다. 그럴 땐 백 팩에 노트북과 마우스, 필기도구와 노트를 주섬주섬 챙겨 넣는다. (물론 텀블러와 손수건, 장바구니도)

‘오늘은 어느 카페로 갈까.’

오늘 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작업 테이블 크기가 넉넉하고 흔들거리지 않는지, 콘센트는 어디에 있으며, 의자는 오래 앉아 있기 편한지, 또 화장실은 깨끗하고, 오래 있어도 카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지 등 최적의 장소를 찾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게다가 플라스틱 없는 생활을 위해 카페에서 이것저것 살펴볼 게 더 많아졌다. 물을 담은 텀블러와 별개로 카페에 머그잔이 없을 경우를 대비해 빈 텀블러를 하나 더 챙길 때도 있다. 가뜩이나 무거운 가방이 더 묵직해진 걸 확인하며 나도 참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이 스치지만, 몸이 불편한 것보다 마음이 불편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그럼에도 일회용 잔에 음료를 받는 날이 있다. 처음 방문한 곳에서 음료가 어디에 담겨서 나오는지 물어보는 걸 깜빡해서 그렇다. 플라스틱 뚜껑까지 덮여 있는 음료를 내려다보며 ‘아, 오늘은 실패다.’ 하는 패배감이 든다. 그리곤 카페 주인의 친절함과 상관없이 ‘여기는 나와 맞지 않는 곳이군.’이란 결론을 내린다. 반대로 빨대를 빼 달라는 요청에 당황해하지 않고 긴 숟가락까지 대신 꽂아 주는 곳에선 주인과 뭔가 통했다는 기분이 든다. 다음에 또 오고 싶어 진다.


나는 커피를 무척 좋아하지만, 카페인에 취약해서 안타깝게도 오후엔 커피를 마시지 못한다. 디카페인 커피라도 있으면 좋겠다만 찾기 어렵기만 해서 차선책으로 차를 마신다. 그러나 허브 차나 과일 차가 없는 곳도 있어 메뉴판을 보고 발길을 돌릴 때가 있다. 이러니 아무리 힙하고 예쁜 카페가 새로 생겨도 위의 조건들이 맞지 않으면 갈 수 없다. 때론 내가 오후든 저녁이든 (심지어 밤이든) 아메리카노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하곤 바란다. 그러면 어디든 다닐 수 있을 텐데. 최근 동네에 새로 생긴 카페를 갔다가 디카페인 커피도 있고 두유와 오트밀 우유도 선택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뻤다. 게다가 의자도 오래 앉아있기에 편하고 말이지. 이름이 다소 긴 ‘디카페인 두유 라테’를 주문하고 쌉싸름한 커피와 부드럽게 넘어오는 거품을 함께 느끼며 오랜만에 완벽함을 느꼈다. 


때론 누군가는 ‘이것저것 따지면서 어떻게 살아.’라고 말을 한다. 특히 불편한 진실 앞에서 더더욱. 나는 어쩌다 이것저것 다 따지는 사람이 된 걸까. 플라스틱을 볼 때마다, 동물성 식품들을 볼 때마다 고통받는 것들이 함께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다. 이건 이타심이 아니라 인류의 멸종을 보고 싶지 않은 한낱 인간의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함을 덜기 위한 노력이 가끔 참 녹록지 않다. 사회 구조라는 거대한 강의 흐름을 혼자 거스르며 올라가는 느낌. 내가 힘을 조금이라도 풀면 너무나 쉽게 큰 물살을 따라 떠내려 거란 걸 안다.


2018년 쓰레기 대란과 함께 카페 문화가 순식간에 바뀐 적이 있었다. 왕구량 감독이 만든 《플라스틱 차이나》라는 다큐멘터리 속엔 전 세계로부터 모인 플라스틱 쓰레기 더미와 그 안에서 먹고 자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중국 정부는 상영을 금지했으나 영상은 널리 퍼져나갔고, 결국 중국은 폐플라스틱 수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여파로 우리나라가 비상에 걸렸다. 중국에 쓰레기를 팔지 못해서 우리나라에서 스스로 처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1인당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이 최상위권인 한국. 좁은 땅덩이에도 쓰레기 처리를 어떻게 하고 있나 했더니, 쓰레기 대란이 터지자 얼마나 대책이 없었는지 알았다. 예전보다 대한민국이 참 편리하고 살기 좋아지지 않았냐며 취해있을 게 아니라, 우리가 행복을 얻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더 불행해지지 않았는지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오늘 나의 편의는 다른 존재의 무엇을 착취한 것일 수도 있음을. 그것이 내 의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그때서야 환경부는 부랴부랴 카페에서 사용하는 일회용 플라스틱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매장 내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사용할 수 없고, 이 영향 때문인지 빨대를 사용하는 문화도 바뀌었다. 어느 프랜차이즈 카페에 갔다가 종이 빨대가 꽂혀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사회의 흐름과 나의 결이 맞아떨어졌을 때, 생활하는 게 이토록 수월하다니. 그런데 동시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뭘까 이 김새는 기분은. 큰 적과 맞서기 위해 완전무장하고 전쟁터에 들어섰지만, 전쟁이 금방 끝나버린 듯한 느낌.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 거였다니.’ 허탈감이 들었다. 확실히 체감한 건 환경문제는 개개인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사회 구조가 바뀌면 훨씬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환경단체들이 시위하고 퍼포먼스를 하고 국회에 청원하고 그런 거구나. 우리를 대신해 외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instagram @mindful.table





매거진의 이전글 이제 필요한 건 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