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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May 09. 2021

초록이 필요할 때

황집중의 단련일기 7호


회색 노트북을 온종일 구워삶다 보면 어느 순간 삶의 활기를 쑥 빼앗기고 간절히 초록을 찾는다. 지난 날 몇 차례 쓴맛을 봐야 했던 번아웃 상태를 피하고자 경험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반응이다. ‘초록을 봐야겠어. 초록을.’ 방에 식물 몇 개가 나와 함께 지내고 있지만 좁은 화분 안에서 지내고 있는 애들을 보면 작은 초록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뿐이므로 들과 산에 높고 넓게 뻗어있는 커다란 초록을 마음껏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마음속으로 외친다. ‘산!’


산이야말로 내가 초록을 마음껏 섭취할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산에 가면 꿀꺽꿀꺽 나무가 가진 초록을 들이킨다. 이런 건 사진에 잘 담기지 않기에 눈으로 살갗으로 마음으로 가득가득 담는다. 스스스 소리와 함께 바람에 우아하게 흔들리는 초록 잎들을 보며 ‘와, 아름답다!’ 연신 읊조리며 현실에서의 고민을 한순간 잊는다. 한껏 푸르름을 충전하며 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다리는 점점 후들거려오지만, 그래도 이때 흘린 땀은 나의 건강함을 환산하는 듯해서 기분이 좋다. 게다가 땀 흘린 후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꿀맛이다. 며칠 전에도 동네 뒷산을 올라 꼭대기에 있는 정자에서 먹는 오이의 맛이 그렇게 달 수 없었다. (그리고 커피도 산에서 먹는 커피가 젤 맛있다.)


마음과 정신을 위한 초록 이외에도 몸이 초록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채식을 한다고 하면 초록 풀만 먹는 줄 알지만 사실 비건 푸드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다. 그래서 비건식이라고 꼭 건강한 것만은 아니다. 비건도 정크푸드가 있고 자칫하면 탄수화물 중심의 영양 불균형한 식사를 할 수도 있다. 비건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비건 베이커리가 있다는 걸 알고 오가는 길에 종종 들렀더니 금세 단골로 환대받는 사람이 되었다. '빵순이가 어디 갈리 있겠어.' 하루는 보건소에서 간단한 신체검사를 할 겸 들렀다가 콜레스테롤 수치도 측정했는데 전보다 중성지방 수치가 높아졌다며 최근에 탄수화물을 많이 먹었는지 질문을 받았다. ‘아, 이러면 안 되겠구나’ 싶어서 그 이후로는 녹색 채소를 잘 챙겨 먹으려고 한다.


비거니즘을 실천한 지 어언 3년이 다 되어 가는 데 거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거 보면 비건으로 사는 요령이 많이 늘었나 보다. 하지만 이 요령이란 말속에는 원래 갖고 있던 나의 식생활의 악습이 또한 비건화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겠다. 슈퍼나 편의점에서 동물성이 들어가지 않은 과자와 가공식품을 귀신같이 잘 찾아낸다. 그러니까 건강을 위해선 비건도 의도적으로 초록 풀을 챙겨 먹어야 한다. 녹색 채소는 그냥 풀떼기가 아니라 영양분이 풍부한 훌륭한 음식이다. 심지어 시금치나 브로콜리 같은 녹색 채소는 단백질 함유량도 많다.(항상 뽀빠이가 생각난다.) 그래서 ‘요즘 몸이 좀 무겁군.’이라고 느끼면 녹색 잎이 달린 것들로 장을 봐 온다. 어떤 요리에 대한 의도 없이 그냥 채소 하나씩 사두면 생으로 샐러드 해 먹거나, 볶거나 찌거나 그날의 기분에 따라 조리하면 된다. 가격도 과일보다 저렴하고 몇 천원이면 장바구니가 가득하다. 많은 양의 채소가 혼자 감당하기 힘들면 피클이나 장아찌로 만들어 두면 된다. 올봄에 한 철 나는 냉이를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을 거 같아 장아찌로 담아뒀더니 아직 잘 먹고 있다. 적다 보니 녹색 채소, 너란 녀석 참 좋구나, 싶어서 다음 번엔 초록하게 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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