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사우나

by 시에스타

퇴근 무렵의 약국은 고요합니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뒤 조제실에서 노트북을 봅니다.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집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감 정리 시간, 조제실의 약들을 하나하나 살피는 일은 단순히 숫자를 맞추는 작업 그 이상입니다. 특히 수급이 불안정한 약들의 재고를 파악하는 일은 더욱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자가 처방전을 들고 왔을 때 "약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의 미안함은 꽤 묵직합니다. 물론 제약사나 도매상의 사정으로 약을 구하기 힘들 때도 잦지만, 그것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하지 못한 것은 결국 약국의 안일함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약이기에, 저는 도매상 홈페이지를 수시로 드나들며 모니터를 응시합니다. 환자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것, 그것이 흰 가운을 입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이자 책임이라 믿으며 말입니다.



그렇게 업무의 무게를 어깨에 얹고 있을 때, 정적을 깨고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오늘 플룻 선생님 오셨는데, 우리 듀엣 곡 한번 맞춰볼까?"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함께 무대에 서기로 한 우리 부부의 약속이 떠올랐습니다. 아내는 매주 집에서 개인 레슨을 받으며 정성껏 소리를 다듬고 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거실 가득 플룻의 맑은 음색이 퍼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우리가 고른 곡은 '약할 때 강함 되시니'. 아내의 플룻과 저의 소프라노 색소폰, 서로 다른 두 개의 관악기가 하나의 호흡으로 섞여야 하는 작업입니다.



사실 무대 준비는 곡 선정부터가 고비입니다. 요즘은 반주기 하나면 참 편하게 연주할 수 있다지만, 저는 이른바 '노래방 음향' 같은 인위적인 기계음을 지양합니다. 조금 번거롭더라도 몇 주간 인터넷을 뒤져가며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MR을 찾으려 애씁니다. 귀에 들리는 소리가 정갈해야 마음도 그 결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레슨 선생님 앞에서 조심스레 첫 음을 떼었습니다. 악보 위로 쏟아지는 선생님의 조언들. 손으로 박자를 짚어주며 템포를 조절해 주는 전공자의 예리한 귀는, 우리 부부의 서툰 연주에 단단한 뼈대를 세워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연주에는 후렴구에 다른 곡을 인용하는 파트를 넣어보려 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듣는 이가 지루할 틈 없이 마음을 적실 수 있는 작은 장치를 고민하는 시간조차 즐거웠습니다.



연주를 마친 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MR에 맞춰 다시 한번 화음을 쌓아보았습니다. 아내와 저, 그리고 선생님의 박자 소리가 어우러지는 그 시간은 오늘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묘약 같았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는 사우나가 몸의 노폐물을 씻어낸다면, 음악은 마음의 때를 벗겨내는 일종의 '정신적 사우나'가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사우나를 마치고 나왔을 때의 개운함처럼, 악기를 내려놓은 제 마음은 한결 맑고 정갈해져 있었습니다.



치열했던 약국 일과와 평온한 거실의 이중주. 그 사이를 오가며 부부가 함께 화음을 맞춰가는 저녁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삶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본연의 나로 돌아오는 회복의 시간이었습니다.

수, 토 연재
이전 18화사람이 만들어 가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