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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유정 Mar 17. 2022

언니, 저예요 <上>

막내 방송작가로 산다는 것

언니, 저예요.

벌써 햇수로 2년 차인데 쓸 수 있는 경력은 3개월인 걔 있잖아요.


작가 하기 전에 5성급 호텔에 있었죠. 3교대와 박봉의 삶에서 이렇게 살 바엔 더 사랑하는 일을 하자며 제 발로 박차고 나왔어요. 그리고 내달린 곳은 어린 시절부터 ‘쓰는 사람’이 꿈이자 독실한 믿음을 가졌던 제게, 대단히 사랑스럽게 보였던 종교방송 막내 작가 자리였어요.

2020년 초, 한 달에 100만 원 안 되게 받으면서 5개 프로그램을 했어요. 많을 땐 7개. 생각했던 방송작가의 모습과는 달랐지만 방송을 위해 필요한 일은 모두 방송의 일부라는 말에 동의했기에 어떤 일이든 다 했어요. 촬영장 오시는 분들이 마실 컵을 설거지하는 일부터 출연자들이 아이를 맡기면 돌보는 일까지. 방송이 끝나면 스튜디오 청소도 했고, 몇백 장 대본을 일일이 찢기도 했어요. 또 출연자 식사를 위해 회사로 음식을 나르고 테이블을 닦고 음식물 버리는 일도 제 몫이었죠. 이런 일을 하며 받았던 보수는 프로그램 한편당 10만 원. 방송계도 박봉이라면서요? ‘세상 방송국에 나가면 더 나쁜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엄청 겁나는 거예요.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자는 생각으로 생활비를 위해 일주일 내내 각기 다른 방송을 매일 다르게 올리며 연명했어요.


근데 왜 그만뒀냐고요? 1년에 2번, 5일간 3시간을 진행하는 생방송 특별모금방송이었는데요. 5일 동안 매일 3시간씩 프롬프터를 넘기며 방광염에 걸리던 그 시간. 저는 110만 원을 받았지만, 모금액은 10억 가까이 모인다는 사실을 들어버렸어요. 그래서 나왔어요.


하지만 밤샘 근무를 하고 생방송을 무사히 내보낸 뒤 엔딩 스크롤에 이름이 나가는 그 짧은 순간을 사랑했기에, 기도를 해주며 세상으로 나왔어요. 종교방송 경력으론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한 종편 신규 탐사보도팀에 합류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상암에 처음 발을 디뎠던 순간. 비밀스러운 일을 취재하면서 ‘와, 작가 진짜 쩐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고… 명찰도 진짜 멋있었어요. 아, 상암 멋진 동네.


당시 그 종편이 벌점 때문에, 특히 탐사보도 같은 프로그램의 신규 편성을 계속 미뤘어요. 그래도 ‘2021년 1월에 편성됩니다. 반드시’라는 말에 계속해서 아이템을 쌓아뒀어요.


약속했던 편성을 앞두고 휴가가 계속 주어졌어요. 한 달이 다 될 때쯤 조연출에게 연락이 왔어요. 얼마 전, 연출진만 불러 팀 해체가 이뤄질 거란 말을 했다는 거예요. 설마 했어요. 메인 작가님도 모르고 계셨거든요. 그러던 2021년 1월 13일 복귀 소식에 약 30명 팀원이 모였고 인사를 채 다 나누기 전에 우리 팀은 메인 피디님의 말 한마디로 실직자가 되었어요. 차라리 휴가가 아니라 더 빨리 말해줬으면…. 다들 멍하니 있을 때 한 메인 작가님의 말씀이 정적을 깼어요. “에라이! 물건이라도 챙겨!”라고요. 물티슈부터 맥심 커피까지… 안 챙긴 게 없어요. 사실은 그 자리에서 울지 않으려고 마구잡이로 챙겼는데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지하철역 화장실 칸 안에서 한참을 고개를 떨구고 있었어요. 이건, 언니한테만 말하는 거예요. 웃긴 건, 그 와중에 ‘그래도 180만 원 받으면서 다녔으니까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니까요.


‘소수 인원으로 다시 팀을 꾸릴 겁니다. 해당하시는 분들께는 이번 주까지 연락드리겠습니다.’ 메인 피디님이 직군별로 따로 불러서 말하더라고요. 정규직 피디가 생살여탈권을 쥔 프리랜서 작가였기에, 마음은 숨기며 막내 작가들끼리 이야기했어요. 연락받으면 말해주자고. 약속했던 날, 단체 메신저 방에 동료 작가가 ‘제가 연락을 받았고, 안 가기로 했어요’라고 보내더라고요. 안 간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게 부러워서 울었어요. 한 3일?


이후로 신규는 겁이 나서요. 정규 방송인 강연 프로그램에 들어갔어요. 사실, 처음 방송한 거죠. 근데 조금 이상한 일들이 있었어요. 메인 피디님이 연락이 와 언니들에겐 말하지 말라며 상관없는 일들을 시켰어요. 그뿐이게요. 주말마다 전화해 놀 만한 곳 어디냐 묻질 않나, 본인 교회로 오라고까지 하더라니까요. 아, 그리고 때때로 제 위치가 저만치 바닥에 있다는 걸 선의를 가장한 말들로 상기시켜줬어요.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인데 종교방송 경력, 론칭 실패한 경력으로 너 아무도 안 써줘. 그리고 너 이 페이, 어디 가도 못 받아. 차라리 경력 아무것도 쓰지 마.” 틀린 말이 아니긴 해서 꾹 견디자 싶었어요. 그런데 웬걸, 정규 편성으로 잘 달리던 방송이 갑자기 들어온 지 3개월 만에 종영한대요. 제 이름이 올라간 7편. 진짜 재밌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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