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어엿한 성인이 된 윤이의 성장은 부모로서 무척 대견하고 또 뿌듯한 것이었다.
그 몸으로 서고 걸을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웠던 신생아 때를 생각하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으니까.
초중고 교육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바리스타로 사회생활을 하게 된 것을 기적이라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지난 날의 고통과 아픔, 불안과 두려움을 한꺼번에 보상 받는 기분이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꽃길에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으려 하는데 1년이 조금 지나 다시 병든 몸으로 온종일 집에서 요양을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적잖이 당황스럽고 절망스러웠지만 꽃길을 걷기엔 아직 자격 미달인 모양이라 여기고 그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내 우려와는 달리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윤이는 되려 그 상황을 즐기는 눈치였다.
모처럼 버거웠던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홀가분함과 편안한 휴식의 달콤함으로 얼굴엔 화색마져 돌았다.
그러니까 그의 요양과 치료에 대한 부담과 덤터기는 오롯이 엄마인 내 몫이었다.
혼자만의 시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던 그간 잠시의 자유와 여가도 삼시 세끼와 간병으로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지금껏 그래왔듯 힘든 시간이 지나갈 것을 믿으며 건강을 회복하는 날까지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 동안 치룬 수차례의 정형외과, 성형외과의 수술과 손과 발의 깁스로 지냈던 무덥던 여름 그리고 고달팠던 통원치료를 생각하면 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싫다고 몸부림을 쳐도 내 몫의 고통과 즐거움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의 것이라고 가르쳐준 지난 경험과 노하우가 다시 위안이 되었다.
어차피 집에서 윤이를 돌보느라 꼼짝할 수 없게 되었으니 짬짬이 시간을 내어 그동안 조금씩 써놓았던 글과 원고를 보강하여 책을 내면 어떨까 싶었다.
윤이를 키우고 돌보느라 살필 겨를이 없었던 지난 시간과 지친 마음을 차분히 글로 정리하여 나와 윤이 그리고 가족 모두에게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하는 작은 선물로 남기고 싶었다.
책이 나올 무렵이면 윤이도 건강을 되찾고 다사다난 했던 지난 20여년 우리 가족의 흑역사가 빛 안에서 찬란하게 갈무리 되어 새 출발의 이정표가 될 것 같았다.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건 아니었다.
결코 한가하지 않은 네 식구의 집안일에다 간병과 치료가 필요한 윤이의 뒷바라지 역시 만만치 않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글을 써야 해서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스타급 연예인도 아니면서 아이돌 못지 않은 살인 스케쥴을 소화하는 것이 마냥 즐거울 리 없었지만 한번 시작한 일이니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끝장을 보고 싶었다.
어떤 날은 글쓰기에 빠져 세끼 밥만 겨우 차려주고 꼼짝없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주객과 본말이 뒤바뀌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글을 쓰면서 억눌리고 상처난 내면을 살피고 무심히 지나쳤던 의미 있는 순간들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보물을 찾아내는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운명에 떠밀려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만 여겨졌던 그 시간 속에는 우연의 모습으로 다가왔던 위로와 휴식도 있었고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세미한 감동과 환희의 순간도 함께 했었다.
가슴 속에는 오랫동안 응어리 져 풀리지 않은, 하고 싶었지만 꺼내지 못했던 수많은 말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풀듯 생각을 정리하여 글과 문장으로 이어나갔다.
혹사당하고 외면 받았던 내 마음을 스스로 치유하는 과정이자 윤이와 가족 모두의 상처 난 마음을 함께 돌아보고 위로하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한편 집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된 윤이는 자기가 좋아하고 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방송과 영상 분야에 흥미와 관심이 있어 예능 PD가 되고 싶은 구체적인 희망까지 마련하고는 방송대학교 관련학과의 원서를 준비 했다.
윤이와 내가 꿈꾸는 가깝거나 먼 미래의 소망과 희망은 건강을 전제로 한 것이었지만 아주 편안하고 환해진 얼굴로 조금씩 쇠약해지는 그의 몸은 회복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의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명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꿈과 웃음을 안고 치료와 요양에 힘쓰면서 마음 한 켠에서 일어나는 불안이 기우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겨울이 올 무렵 제 방에서 또 한번 넘어져 코뼈가 다시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고 나자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의 공포로 엄습하였다.
원인을 모른 채 일어나는 사고와 쇠약의 과정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 아닌 꿈(dream)이길 바라면서
윤이와 나는 현실을 넘어선 꿈(hope)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이었다.
낭떠러지가 코 앞에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