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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산 Aug 06. 2018

루게릭, 빛나는 절망의 이름

“불운을 피하려고 독 안에 숨었더니 독이 깨지더란다”

운명의 집요함과 불가피성을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말이 또 있을까.

끝까지 주인공을 찾아내어 그의 삶을 좌우하는 운명의 얄궂은 엄중함이라니...

어릴 적 외할머니로부터 스치듯 들은 이 말이 삶의 고비마다 생각나는 것은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피하지 말고 당당히 맞아 극복하라는 가르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나에게는 불가항력적 운명의 힘과 무게가 두려움과 함께 선명하게각인 된 문장이었다.    


단골환자로 등록된 국립 S대 병원은 예약 후 대기가 너무 길어 하루 빨리 원인을 찾고 싶은 성급한 마음에 입소문 난 신경과 전문의를 찾아 나섰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을 받아보라는 그의 심각한 권고로 다시 인근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해야 했다.

아무래도 국립 S대 병원에 가봐야 정확한 진단이 가능 할 것 같다는 담당의사의 말은 무책임한 변명으로 들렸고 가시처럼 뾰족한 납덩이가 되어 가슴에 와 박혔다.

원인도 알 수 없고 증상과 검사만으로는 정확한 병명과 치료법을 말하기 어렵다면 흔치 않은 희귀병이라는 뜻이 아닌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소름끼치는 여러 검사를 마치고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이 된 윤이를 태우고 돌아오는 길엔 나 또한 반쯤 넋이 나가있어 뻔한 귀가 길을 오랫동안 헤매 돌기까지 했다.    


피치 못할 운명처럼 다시 찾은 국립 S대 병원에서 고통스러웠던 검사의 과정은 되풀이 되었고 여러 날에 걸쳐 더 많은 첨단 기계가 동원된 훨씬 다양하고 꼼꼼한 방식으로 몸의 여러 기관을 샅샅이 살폈다.

두려움과 고통에 절규하는 아이 곁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찢어지는 가슴 깊이에서 터져 나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는 것 뿐이다.

내 가슴의 고통이 윤이의 육체적 통증을 줄여줄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 실은 더 큰 아픔이었다.   

 

원인을 찾기 위한 여러 검사의 고통이 완쾌의 희망으로 수렴되기만을 바라면서 결과를 기다리는 나날은 피를 말리는 심정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윤이의 증상과 상태에 대한 의학적 의문을 풀고자 나름 애써 알아낸 병명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름, ‘루게릭’(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었다.    

젊은 나이에는 발병 확률이 지극히 낮은 불치의 희귀병 ‘루게릭’.

운동신경의 퇴행성 질환으로 사지에 힘이 약해져 자주 넘어지고 기력이 떨어져 금방 피곤해지며 손이 마르는 전형성의 초기 증상이 지금까지 윤이에게 나타났던 사고와 증상과 상태에서 대체로 일치하여 부정할 수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기는 힘들었다.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라는 물음이 밤낮없이 뇌리에서 무한 반복되는 사이 점점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확진 전에는 그 어떤 상상도 하지 말자 수없이 되뇌이며 그 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결과를 확인하는 날 혹시 사형선고와 같은 병명을 윤이가 같이 듣게 될까봐 그를 배려한 시나리오를 짜놓고 담당 의사를 만났다. 

환자를 앞에 두고도 시큰둥한 표정으로 컴퓨터만 응시하며 증상과 검사결과를 에둘러 말하던 그에게 윤이를 진료실 밖에서 잠시 기다리게 요청하고 ‘루게릭’이 맞냐고 조심스레 묻자 놀란 듯 우리 부부를 쳐다보며 서둘러 희귀난치성질환자에게 국가가 지원하는 ‘산정특례대상자’로 지정해 주었다.    

검사가 더 필요하면 입원오더를 내리겠다는 냉담하고 무심한 의사를 뒤로 하고 윤이와 좋아하는 음료수를 하나씩 사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산산이 무너져 복잡해진 마음처럼 교통체증으로 사방이 꽉 막혀 있었다.

겨울 오후의 시리듯 쨍한 햇살은 암흑과도 같았고 검붉은 운명은 우리를 단단히 붙들어 옭아매어 원치 않는 곳으로 곧장 데려갈 기세였다.

 

악화일로인 운명을 탓할 기력조차 없었지만 눈치 빠른 윤이를 의식하여 복받치는 서러움을 속으로 욱여 넣고 시시한 농담으로 그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    

잘 먹고 잘 쉬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요양을 하면 머잖아 나을거라 했다는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윤이의 표정은 든든한 부모 곁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긍정적인 희망으로 환하게 빛났다.

절망의 끝자락과 희망의 원천이 나란히 앉아 서로 다른 색깔과 엇갈리는 명암으로 차창 밖 저 너머 각자의 앞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이와 함께 했던 희노애락의 모든 순간이 일시에 무의미 해져버린 것 같은 허탈함과 아찔한 현실의 혼란스러움으로 정신이 아득하였다.

그리고 

모질고도 야멸찬 운명 앞에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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