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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Sep 23. 2021

19. 키즈 카페에 가면

  올 추석 연휴는 주말 뒤에 이어진 터라 5일‘이나’ 되었다. 직장인들과 학생들에게는 5일‘밖에’ 안 되는 짧은 연휴였을지도 모른다. 연휴 동안 남편은 하루도 쉬지 못했고, 시어른들도 이사 준비로 분주하셔서 아이들과 셋이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토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빼곡하게 바쁘면서도 지루했고, 나의 체력과 멘탈은 탈탈 털려 탈곡기 같은 시간들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등원을 했다. 이제 좀 내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녹아내린다. 마치 걸쭉한 탕수육 소스 안에 들어있는 검고 흐물거리는 목이버섯이 된 느낌이다.     

 

  등원을 하지 않는 날이면 아이들과 무엇을 하며 보낼까 늘 고민한다. 둘째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스스로 운신을 할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다. 이제는 혼자서도 둘을 데리고 다닐 만하다. 토요일은 늘 그렇듯 도서관을 다녀왔고 일요일은 미리 예약해 두었던 박물관에 다녀왔다. 월요일은 가보려고 벼르고 있던 트램펄린 파크에 다녀왔다. 1호가 트램펄린을 아주 좋아한다. 추석날이었던 화요일, 웬만한 곳은 다 문을 닫아 오후에는 공원에나 가야겠다 했는데 아침부터 비가 온다. 하…. 깊은 한숨이 새에 나온다. 그러다 집 근처 대형 마트가 영업을 한다는 것이 생각났고 1층에 있는 키즈카페를 검색하니 감사하게도 문을 열었다. 그렇게 또 실내놀이터를 찾았다. 연휴 마지막 날, 또 어디를 가볼까 생각하는데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천둥번개까지 치면서 비가 쏟아진다. ‘옘병’을 외쳐야 할지, ‘오예’를 외쳐야 할지 분간이 잘 안 되는 가운데 1호가 자주 가던 키즈카페를 가자고 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두 시간을 하얗게 불태웠고 나는 마음속으로 ‘오예’를 외쳤다. 날씨 탓도 있겠지만 다들 아이들 데리고 갈 곳이 어지간히도 없는지 키즈카페는 아이들과 보호자들로 붐볐다. 시국이 이러한데 아이들 데리고 이렇게 사람 북적거리는 곳을 오다니, 나는 이 미친 짓을 왜 하고 있나 싶다가도 키즈카페가 문을 열어줘서 고마운 마음도 숨길 수가 없다. 키즈카페도 내 마음대로 못 가는 더러운 세상이다! 퉤 퉤 퉤!!


  키즈카페 이야기가 나오면 늘 말하지만, 아이들을 키즈카페에 데리고 간다고 해서 보호자들이 마냥 놀다가 올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큰지, 자주 와본 곳인지, 키즈카페의 규모가 얼마만한지에 따라 다르지만 아이들이 노는 동안 ‘보호’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곳이다. 추석 당일에 갔던 대형 마트 안에 있는 키즈카페는 규모가 꽤 커서 장소가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고, 놀이 시설도 유아보다는 아동들이 놀기에 더 적합한 것이 많다. 아동들은 유아들에 비해 움직임도 빠르고 동작이 크기 때문에 아이들끼리 부딪히거나 다툼이 생길 가능성이 커서 계속 따라다니며 지켜봐야 한다. 특히 우리 집 2호 같은 유아를 동반한 보호자라면 더 세심히 따라다녀야 한다. 키즈카페에 가보면 대부분이 엄마가 보호자로 함께 오지만 휴일인 경우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많다. 이번 추석에도 아빠와 함께 온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가슴팍에 ‘Just Do It’이 선명하게 적힌 티셔츠를 입고 종종거리며 최선을 다해 최저속도로 아이 뒤를 쫓아가면서 하이톤으로 외친다. “거기 서!” 아이가 어디 있는지 뻔히 다 보이지만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못 찾겠다 꾀꼬리”를 읊조리면 평생 부를 꾀꼬리를 다 부른다. 팔에 현란한 문신이 가득하고 손가락에는 왕사탕만 한 반지를 끼고 손목에는 터널 증후군을 유발할 것 같은 묵직한 메탈 시계를 걸친 아빠가 “이건 뭐야? 아이 맛있겠다!”하면서 예쁜 목소리로 딸이 만든 음식을 팔아주기도 한다. 혼자 쭈그려 앉기도 벅차 보이는데 아이의 “얼른 들어와. 여기 되게 좋아” 한마디에 산만한 몸을 구겨서 작디작은 인디언 텐트에 몸을 욱여넣어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아빠들에게 ‘좋은’ 아빠라고 이름을 붙여준다. 그 모습들이 ‘좋은’ 아빠의 모습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가끔은 그 순간마저도 버리는 아빠들이 있다. 함께 놀 친구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 하나, 아빠 하나 이렇게 와서는 아이는 아이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그저 공간만을 공유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는 이미 아빠의 그런 모습이 익숙한 듯 놀아 달라 요구하거나 보채지도 않는다. 그동안 아빠는 편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기본으로 나오는 음료를 홀짝이며 휴대폰과 혼연일체가 되어 난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를 몸소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아빠들을 보며 ‘저 모습을 와이프가 봐야 할 텐데….’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저 아빠의 모습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엄마라고 이 ‘후진’ 아빠의 모습을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육아는 팔 할이 기다림이다. 아이의 마음으로 아이의 속도를 받아들이고 발맞춰줄 수 있다면 소리 지를 일도, 아이를 다그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아이보다 빠른 속도로 걷고 있고, 늙고 있어서 기다림의 여유를 갖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고 주시를 하다가도 아이들이 한 가지 놀이에 집중을 해서 노는가 싶으면 슬그머니 손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SNS를 켜서 나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삶을 좀 흘겨보다가, 친구들에게 ‘키카 왔는데 사람 더럽게 많다’라며 궁금해하지도 않는 글을 남겨보기도 하고, 필요도 없고 살 마음도 없는 물건들을 이리저리 눌러보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다시 아이들을 힐끔 쳐다보고 눈이 마주치면 함께 웃어준다. 시계를 다시 보지만 겨우 5분이 지나있다. 옆을 보니 저 엄마도, 저 아빠도 나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인다. 얼른 두 시간이 지나서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지만 집에 가면 그래도 키즈카페에서 애들끼리 놀고 그저 따라다니기만 했던 그 순간이 편했구나 싶은 생각이 올라온다. 이래서 키즈카페를 또 가게 되나보다. 비록 ‘후진’ 짓을 좀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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