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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임 Oct 03. 2021

21. 겁쟁이의 백신 접종기

  나는 우주 최강 겁쟁이다. 원래도 겁이 많은 편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우주 최강이 되었다. 나의 겁은 오만 데서 발동한다. 홀로 걷는 어두운 밤길에서는 당연하고 내가 본 공포영화는 사십 평생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20대 때 버킷리스트에 적기도 했던 온갖 익스트림 스포츠도 이제는 안 하고 싶다. 산 위에 걸쳐진 출렁다리며 바다를 위를 가로지르는 해상 케이블카도 너무 싫다. 비행기도 여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타는 것이지 만약 육로로 어디든 갈 수 있다면 비행기는 안 타고 싶다. 운전을 할 때도 최대한 안전운전을 하려고 애쓴다. 평상시에는 절대 쓰지 않는 쌍욕을 내지를지언정 급가속, 급차선 변경, 앞지르기, 급정거 이런 것과 거리가 멀다. 몇 년 전 온 나라가 지진의 공포로 들썩였을 때 약간의 진동이나 흔들림에도 온몸에 털이 일어서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단층 주택에 살았으면서 말이다. 지진은 내가 무엇을 진짜 겁내는가를 알려주었다. 땅이 우루루 흔들렸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내가 죽으면 내 새끼는 누가 키우냐고!!’였다. 그렇다. 엄마 없이 자라게 될 내 새끼들을 생각하면서 안전민감증의 삶을 살게 되었다. 이런 내가 스카이점프라니, 번지점프라니 아니 될 말이다. 


  출산과 육아로 몸이 허해졌는지 잔병치례가 잦아졌다. 건강상의 문제도 큰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혹 큰 병으로 발전할까 병원을 자주 찾게 된다. 엄마가 암을 앓았었고, 엄마만큼이나 예민한 성격이다.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는데 잔병 없이 살기 힘든 스타일이라는 소리다. 이런 나를 겁주는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으니 바로 코로나 백신이다. 금요일에 백신 1차 접종을 하고 왔다. 일주일 전에 남편과 함께 맞으려고 같은 날 예약을 했다가 아이들과의 여행으로 한 주 미뤄 맞고 왔다. 맞기 전부터, 사실 예약을 할 때부터 이걸 맞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일찍이 잔여백신을 맞은 지인이 3일을 죽을 듯이 아팠다고 전한 후기부터, 친구가 해 준 몇 다리 건너 아는 이가 백신 맞고 이틀 만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나의 망설임에 힘을 실었다. 더  미루고 싶었지만 기간이 지났는지 앱에서 진행이 되지 않았다. 염병. 난 전업주부에 만나는 사람도 별로 없고 가는 데도 정해져 있는데라며 맞지 않을 이유들을 들먹여 보지만 소용없다는 것도 잘 안다. 어쨌든 맞고 와버렸다. 


  주사를 맞은 후 15분 정도 앉았다 가라고 한다. 고작 15분이라니. 집에 가면 혼자 있는데, 집에 가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라고 집에 가라는 거야 싶은 생각을 하며 마련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집에 갈까, 아빠한테 갈까 고민을 하는데 전화가 울린다. 통화 좀 하자고 약속했던 친구였다. 오랜만에 목소리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로 전화를 끊었다. 57분이 지나있었다. 반가운 친구 목소리 덕분이었을까. 아무렇지도 않았다. 집에 가야지. 집에 다 와가는데 점심시간이라 배가 고팠다. 백신 맞느라 마음고생한 나에게 근사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졌다. 집 근처에 있는 비싼 파인 레스토랑으로 차를 몰았다. 그렇지, 여긴 내가 좋아하는 엔쵸비 파스타가 있는 곳이지. 엔쵸비 파스타를 주문했다. 으음, 냄새부터 비싼 것이 느껴졌다. 둘이 오면 비싼데 혼자 오니까 머 그리 비싸지도 않네 하며 점심 한 끼에 23,000원을 시원하게 결제했다. 백신 맞고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가기 전에 좋아하는 거라도 먹어야 되니까 말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집에 오는 길, 어느 때는 자식새끼들 놔두고 죽을까 봐 바들바들 떨다가도 죽기 전에 즐길 마지막 만찬을 생각할 때는 죽음 앞에 의연함까지 꺼내 보이는 내가 참 우습다.


  때마침 남편이 퇴근할 무렵 두통이 시작되었다. 타이레놀을 꺼내먹고 머리 싸매고 누워버렸다. 저녁밥도 아이들도 나 몰라라 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남편은 엉덩이 붙일 사이 없이 왔다 갔다 하며 아이들을 건사하고 내팽개쳐둔 살림을 쓸고 닦는다. 다행히 두통은 가라앉았다. 아직까지 팔이 좀 욱신거리지만 백신이 걱정했던 것만큼 꼭 나쁘고 무서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2차는 좀 더 아플 수 있다는데 2차 맞고는 뭘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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