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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시호 Aug 19. 2018

많은 물건과 함께 살기

맥시멀리스트의 변

몇 년째 미니멀 라이프, 일본식 표현으로는 단샤리의 유행이 지속되고 있는데, 아직도 그러한지는 잘 모른다. 한동안 서점에서 관련 서적들이 책장에 꽂혀있기보다는 띠지를 두르고 누워있었기에 유행을 절감했었는데, 최근에도 유행인지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신촌(아직까지 이곳이 젊음의 거리라는 인식이 유효하다면!)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 미니멀리즘의 대명사인 일본 M사의 대형 매장이 들어선 것으로 보아 그 유행이 완전히 일시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연역해 볼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유행을 한사코 거스르는 맥시멀리스트다. 




기능이 주는 유능감


나이가 한자릿수일 때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준비물로 컴퍼스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부모님과 대형 마트의 문구 코너에서 컴퍼스를 샀는데, 내가 고집을 부려 그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을 골랐다(내 싹수 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컴퍼스는 제도용 컴퍼스, 그러니까 전문가용이었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컴퍼스를 꺼냈을 때 친구들 것과 내 것이 좀 많이 다르게 생겼다는 것을 발견하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지만, 오히려 그 다름에 대한 인지 때문에 나는 내 컴퍼스를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양쪽에 각기 다른 높이에 꺾을 수 있는 관절부가 있고 그 가운데 한쪽 다리는 연장 가능한, 니들과 흑연 심을 교체할 수 있는, 그리고 그것들의 고정에 각각 작은 디스크가 사용되는, 니들은 각각 매끈하게 날카로운 모양과 층이 한번 진 모양이 양면에 존재해서 뒤집어 낄 수 있는, 작은 원통형 케이스에 몇 개의 리필심이 들어있는, 갈색의 헤드에 브랜드 명이 쓰여있는, 손잡이와 디스크들은 톱니바퀴처럼 처리한 그 컴퍼스. 


독일의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이 물건은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데(물론 비약이지만) 사용하는 문구 치고는 너무 멋지지 않은가. 그리고 왠지 이 컴퍼스를 가지고 있으면 남들보다 더 훌륭한 원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실제로 직경이 큰 원을 그릴 수는 있었다) 느낌적인 느낌느낌. 

나는 기능에 대한 경이감과 이 모든 기능을 만드는데 최적화된 구조, 그리고 이 물건이 내게 선물한 유능감을 잊지 못한다(고작 남들보다 좀 더 큰 원을 그릴 수 있었을 뿐이지만). 이 컴퍼스가 보다 전문적인 기능의 물건을 선호하게 된 것에 대한 첫 기억이다. 이 어린이는 자라서 자신이 다루지도 못할 전문적인 기능의 물건들을 자꾸만 사대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전문적인 기능의 추구는 한 분야에 특화된 기능의 추구와 하이엔드의 추구로 분화되었다.




만듦새에 대한 찬탄


몇 년 전 배우자의 생일선물로 오렌지박스로 상징되는 H사의 지갑을 산 적이 있다. 기능이랄 것은 여느 지갑과 다름없었지만 각 모서리에서 균일하게 멈춘 스티치, 접혀 박히는 부분에서 실크의 나염이 기울지 않고 일정하게 잘린 점 등이 대단히 놀라웠다. 같은 모델의 제품을 몇 개 꺼내서 가죽 상태나 실크 배색을 비교할 수 있게 해 준 셀러도 고마웠지만. 선물 받은 이로 하여금 'The 지갑'이라고 별칭 하게 만든 놀랍도록 깔끔한 마감이 정말 감동적이었던 게 기억이 난다. 무언가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알 거다. 같은 물건을 여러 개 만들 때 모두 같은 완성도를 가지게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훌륭한 기능의 물건들을 소유하는 것은 내 무능감을 감쇄시켜 주었다. 가령 청소에 젬병인 내가 좋은 청소기와 다양한 청소도구를 구비함으로써 마치 청소를 잘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물론 실제로 쪼렙일수록 장비빨은 중요하므로 실질적 청소 수준은 약간이나마 상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건으로 구축한 유능감은 썩 건강한 게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으로, 특히나 나같이 자존감이 발목에서 찰랑거리는 사람에겐 더욱 좋지 못하 현상인 것은 분명했다.


만듦새가 좋은 물건들을 소유하는 것은 마치 내가 좋은 테이스트를 가진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좋은 테이스트를 가질 수 있는 환경에서 나고 자라지 못했다. 게슈막이랄지, 아비투스랄지, 그런 것이 없는 데 열등감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좋은 만듦새의 물건이 이렇게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안녕? 얘는 조금 비싸지만 만듦새가 좋은 물건을 사서 오래 사용할 줄 아는 그런 고상한 소비 기호를 가진 사람이야. 물론 내 소비 기호는 별반 고상할 것이 없고 결함을 찾기가 수월하지만, 이렇게 좋은 만듦새의 사는 것으로 그것이 좀 희석되는 느낌을 받았다. 문제는 만듦새가 좋은 물건은 비싸다는 데 있다. 사실 만듦새만! 좋은 물건은 그리 비싸지 않지만, 만듦새도! 좋은 물건은 하나씩 살 때마다 카드값에 대한 수심이 가득 해지는 것이다. 괜찮아 내가 돈이 없지 신용이 없나!


나는 많은 돈을 썼다. 돈의 많고 적음이야 상대적인 것이니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나는 내 딴에는 많은 돈을 썼다고. 많은 물건을 만났고, 다양한 환희를 맛보았다. 물론 많은 물건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스러져갔고, 좌절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삶에서 물건들이 차지하는 위치, 물건을 들이는데 수반되는 지출, 물건과 관련해서 건강하지는 못해도 길티플레저로 남길 수 있는 감정과 건강하고도 생산적인 감정 등. 물론 그 모든 것에 대한 기준도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자조적인 뉘앙스를 담아 물욕이라고 퉁쳐왔던 물건에 대한 내 감정들, 욕망이거나 자부심이거나 경이로움이거나 한 그 감정들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된 것이 내게 가장 중요한 변화였다. 막연한 죄책감을 덜고 행복을 더할 수 있었던 그 변화를 조금 더 가지런히 고르고 정돈해서 기록해 볼 요량으로 이 매거진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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