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불가능한데요?
모두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에서 '착하다'라는 말은 큰 칭찬이다. 그래서일까? 인터넷 상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의 이슈들은 대체로 착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개별적으로 따져 보면 모두 복잡한 사건들이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지만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착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착한 사람이 피해를 봤으므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요지인 경우가 많다. 이는 연예인 뿐 아니라 유튜버, 정치인 나아가 일반인까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논리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반전되는 경우가 많다. 잘못을 한 가해자가 불특정 다수에게 과다한 비난을 받으며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로 뒤바뀌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 그 '가해자'는 그들의 고통을 대외적으로 말하지도 못하고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종의 불공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분명히 범죄자가 아닌데 가해자는 영원히 가해자 이미지를 벗을 수 없고, 피해자 또한 그렇다.
과연 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국어시간에 배웠던 전통 소설의 인물 특징을 기억하는가? 전통적인 한국 소설에서는 권선징악 형식의 줄거리를 많이 차용하였다. 그래서 착한 사람은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어 지고, 사건이 종결될 즈음엔 필연적으로 착한 사람은 상을, 나쁜 사람은 벌을 받게 된다. 이와 달리 현대 소설은 입체적인 인물을 추구한다. 사람에게는 모두 다양한 면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소설 속에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온 사람이 사실은 가정폭력범이었다거나, 학교에서 인정받는 전교 1등이 사실 악플러였다거나 하는 예가 있다. 이렇듯 사람의 정신은 굉장히 복잡해서 경계를 명확히 나눌 수 없고, 단순히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 이렇게 규정지을 수 없다. 단순히 '착한 사람' 혹은 '나쁜 사람'으로 누군가를 정의내리는 것은 굉장히 간편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현대인데 아직도 과거 저 어딘가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인간은 사실 선택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와 마주하게 되고 원했든 원하지 않든 단 한 가지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 두렵지만 어쩄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한 과거의 선택들이 누적되어 결국 현재의 나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본인이 생각하기에 가장 적당한 선택을 고르고자 한다. 기준에 따라 다양한 예를 들 수 있겠지만, 착한 사람이란 결국 대부분의 상황 속에서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에게 이득을 주는 선택이 될 수도 있고,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한 선택이 될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결국 착하다라는 것 자체가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아니라 인간이 행하는 선택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 선택의 집합체가 인간을 구성하기에 그것이 인간 자체의 특성처럼 여겨질 뿐이다.
하지만 일생동안 언제나 착한 선택만을 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일단 착함의 기준이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기에 주관에 따라 판단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으며, 본능적으로 욕망을 좇고자 하는 인간에게 무결함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대체로 착한 선택을 해 왔던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올바르지 못한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같은 선택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여기기기도 한다. 사람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 완전하다면 그것은 신에 가까운 존재일 것이다.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 또한 이를 언급한 적 있다.
(*종교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득이하게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너희 중 죄를 짓지 않은 사람만 이 사람에게 돌을 던져라.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는 뜻이다. (돌을 던지라는 뜻은 아니었을 테니까..)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그것이 중범죄가 아니라면 반성과 갱생을 통해 용서받을 권리가 있다. 사실 형법 상 중범죄도 구원의 여지가 있지만 이 부분은 개인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자.
유명인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사람들은 그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고 욕한다. 원래 착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쁜 사람이어서 배신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더 강도 높은 비난을 하고, 그들이 '버릇을 고치길' 바란다. 비난을 받는 사람들은 정말 그러한 잘못을 했다. 잘못을 했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정당한 보상을 통해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악인으로 낙인찍히고 대중에게 무수한 비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비난은 단죄가 아닌 오락일 뿐이다. 대외적인 비난의 이유는 윤리이지만 내용은 괘씸죄이다. 자극에 자극을 거듭해 더 큰 자극을 좇아 인터넷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익명을 쓴 비난은 좋은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가해자로 낙인찍힌 유명인은 해당 사건의 맥락에서는 가해자이지만, 비난의 맥락에서는 소수자이다. 변명 없이 사이버 불링을 감내해야 하는 약자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는 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논리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나는 이것을 '혐오의 놀이화'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혐오를 일상적으로 즐기고 그곳에서 자극을 느껴 이를 오락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모든 경우에 이러한 논지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내가 말한 것은 범죄 수준이 아닌 잘못에 대한 것이다. 나 또한 순결한 사람이 아니며 살면서 크고 작은 실수를 범했다. 그럼에도 내가 이러한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의 비난이 과도함에도 모두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니까' '착하지 않으니까' 라는 이유만으로 정당화되는 실태를 비판하고자 함이다. 더군다나 누군가 잘못을 하고 나면 그 사람의 과거 행동까지 모두 공유되며 이 사람은 원래 나쁜 사람이라서 과거에 이런 행동을 했다는 논리가 형성되기도 한다. 이분적이고 편협한 시각이다. 여러분들도 그렇듯이, 모든 인간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들만큼 복잡하다.
학교에서 배운 위인들이 미디어가 넘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똑같은 위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들이 완전한 위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그들의 대단한 부분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사생활이 문란한 사람들도 많고, 지금와서는 비난받을 잘못을 한 사람도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해보이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인정해야만 한다. 유명하다고 해서 비난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에 대한 합리적인 의견 개진은 비판이 되지만, 정도를 넘어서는 인격적 모독은 무례이다. 그 사람의 잘못을 일깨워주기 위해 한다고 해서 욕이 욕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용서받길 바라면서 타인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욕심이다.
우리는 흥망성쇠가 급격한 시대에 살고 있다. 다양한 미디어 속에서 사람들은 쉽게 유명해지고, 다시 쉽게 욕을 먹고 사라진다. 착한 사람은 대단한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착한 사람은, 타인을 이분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한 번도 잘못을 저지른 적 없는 고결한 사람만이 착한 사람이라면 나는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겠다.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지쳤다.
<이미지 출처>
1.http://picturebook-illust.com/artist_book.asp?b_code=8603
2.https://namu.moe/w/%EA%B0%84%EC%9D%8C%ED%95%98%EB%8B%A4%20%EC%9E%A1%ED%9E%8C%20%EC%97%AC%EC%9D%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