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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te Jun 11. 2021

그래서 결국, 계단 오르기

나도 생산자가 되고 싶어요 -

10년 전, 회사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친한 언니가 결혼을 했고 형부 따라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학교 선생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더하고 싶다고 갈망했다. 돈 잘 버는 형부도 만났겠다. 안정적인 직장도 있겠다. 언니 이제는 좀 즐겨요라는 내 말에. 


"나는 생산자가 되고 싶어."라고 그 언니는 답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됐던 나는, 다른 회사로 옮기고 싶어, 퇴근 후에도 공부를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내가 언니였다면 편하게 살 텐데라는 생각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저 대화가 기억에 남는 거 보면 꽤 인상 깊은 대화였나 보다. 사실, 지금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말이다. 너무나, 정말 가슴 깊이 나도 생산자가 되고 싶다. 


현재, 나는 37주 차 임산부다. 나의 대략적인 일과는 하루 세끼 챙겨 먹고 틈틈이 육아서적을 읽고, 틈틈이 운동하고, 틈틈이 놀면서 남편의 퇴근을 기다린다. 뭔가 지루하다. 영상 보는 것도 지겨울 정도로. 간단히 말해, 아가가 얼른 태어나기만을 바라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내가 바라던 생활이긴 했다. 한국에서 약사시험을 준비할 때, 할머니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할머니가 "티비 보고 있지"라고 했는 데, 난 그런 시간이 있다는 게 너무 부러웠다. 눈을 뜨면 시험에 대한 불안감에 공부 생각밖에 없는 시기였으니까.


그동안도 그래 왔다. 회사 취업을 위해 달렸고, 그렇게 들어간 회사는 경쟁이 치열했으며, 약사를 준비하는 과정도, 약대 과정도, 약사시험까지도 쉼 없이 달렸다. 그런 내게 할머니의 일상인 그냥 TV 보기는 큰 부러움이었다. 할머니한테 "부러워요"라고 표현할 정도로 마음 편안한 일상이 그리웠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의 내 일상이다.


얼마나 축복인가. 남편은 재택근무 중으로 언제든 나와 수다 떨며 식사를 할 수 있고, 보고 싶은 책, TV 다 봐도 되고, 놀만큼 놀아도 괜찮은 시간. 몸이 좀 많이 불편하지만. 


그럼에도, 지루하다. 세상에 널린 콘텐츠를 향유하기에도 바쁜데, 무척 지루하다. 그건 분명 10년 전 친한 언니가 표현한 대로, 내가 소비자로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소비자로 사는 것도 괜찮은 것일 텐데, 그냥 내 성향상 소비자의 삶이 맞지 않는 거겠지. 


주변 사람들처럼, 나도 생산자가 되고 싶은데, 37주 임산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한정된다. 그나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생산이라고는 배 속의 아가를 건강하게 키우고 출산하는 것이리라! (따지고 보면 가장 큰 생산이지.)


건강한 출산을 위한 내 노력 중 하나가 바로 계단 오르기. 내가 계단 오르기를 선택한 이유는 코로나가 한 몫했다. 미국에 있다 보니 백신 맞은 사람들이 매우 많다. 게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도 증가하고 있다. 아파트 헬스클럽조차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방침이 내려왔다. 백신 접종을 출산 뒤로 미룬 나는 백신 접중 비율이 늘어날수록 집에 꽁꽁 숨는 수밖에. 


계단이 그래서 유용하다. 사람들이 계단을 이용하고 있지 않아 안전하다. 게다가 우리 아파트는 41층이며, 집은 5층이라 한 번만 해도 유산소 운동에 근력운동까지 된다. 무릎만 조심하면, 강력한 중력으로 태아가 자궁에 잘 위치할 수 있게 도와주며, 하체 근력 증가로 순산에 도움이 되는 강력한 운동이다. 


41층 도달 후, 맛보는 열매

임신 35주부터 계단 오르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41층까지 가는데 총 3번을 쉬었다. 요즘은 쉼 없이 빠르게 올라간다. 계단 오르기 팁은 명상이다. 사실 명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냥 자신의 생각에 빠지는 것이 좋다. 시간이 단축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아침을 먹고 나서 계단을 오르는 데, 오늘은 뭘 해야 잘 보냈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집 청소를 계획한다거나, 출산용품 정리를 머릿속으로 하기도 하고, 오늘은 브런치를 써야지라고 생각도 했다. 그러다 보면 고진감래 격으로 눈 앞에 멋진 시애틀 풍경이 펼쳐진다. 시원한 바람맞으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이 맛에 계단을 오르지"란 생각에 항상 도달한다. 


육아가 시작된 삶은 아직 상상하기 어렵다. 육아서적도, 육아 선배들도 삶이 통째로 바뀌게 될 거라고 하는데, 불안감보다 기대감이 큰 지금이다. 아기가 태어난 후에도 지금처럼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맘이 더욱 간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내 몸을 움직이는 게 그나마 생산적이란 결론이다. 

이 맛에 계단오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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