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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요일 밤 과자점 Oct 11. 2021

안녕, 나의 도시, 나의 런던

런던 어디까지 가봤니

 런던을 걷는다. 다들 가는 웨스트엔드, 소호, 옥스퍼드 스트리트, 하이드 파크처럼 짧은 여행길에 보는 런던이 아니다. 조금 더 깊숙이,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낯선 런던을 걷는다. 하루 2만보를 채우고, 나의 집 헴스테드 히스를 기준으로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나만의 걷기 리추얼. #오늘도걷는다2만보


시작은 부활절 연휴였다. 동거인 혜림이가 부활절 연휴를 맞아서 2박 3일 명상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조용히 명상하는 혜림이에게 되도록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생활하면서 내가 잠시 집을 비우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맛있는 커피가 먹고 싶었다. 명상 기간 동안 식사 메뉴도 자연식 위주로 하겠다는 혜림이었기에 나도 밀가루를 먹지 않는 1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밀가루는 안 먹을 수 있는데 커피는 먹고 싶었다. 그래서 혜림이가 추천해줬던 카페를 걸어서 간다는 목표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3일 연속으로 매일 걸었다. 열심히 걸어가면 맛있는 플랫 화이트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힘차게 걸을 수 있었다. 첫날.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프림로즈 힐 공원을 지나고 리젠트 파크를 통과하면 Kaffeine에 도착한다. 1시간 10분 코스. 플랫 화이트를 한잔 사들고 옆에 한적한 골목에 들어가 어느 폐쇄된 건물 처마 밑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한 모금 마시면, 그 순간이 행복이고 기쁨이다. 다음 날, 다시 이어폰을 꽂고 오늘의 BGM은 뭐가 좋을까 선곡을 하며 하이드 파크를 가로지르고 Guillam Coffee House에 들른다. 1시간 30분 코스. 커피를 사서 하이드 파크로 다시 돌아간다. 공원의 한적한 곳에서 다시 한 모금. 뻐근한 다리와 후끈한 발바닥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셋째 날, 캠든타운을 지나 리젠트 카날을 따라 에인절 역을 지나면 기숙사가 있던 올드 스트리트 역 근처 Ozone Coffee Roasters에 도착한다. 1시간 40분 코스. 역시 맛있는 플랫 화이트를 사서 근처 공터에서 원샷하듯 마시고 다시 집으로. 그렇게 3일 동안 조금씩 멀리 걸어 보았다. 별 것 아니었는데 뿌듯하고, 힘들만한 거리였지만 힘들지 않았다. 왕복 3시간 정도면 2만 보가 된다는 걸 깨달으면서, 이거 앞으로 계속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림이에게 나의 계획을 말해주었다. 앞으로 일주일에 5일 정도는 2만보를 걸어볼까 한다고. 맛있는 커피가 기다리는 도보여행은 행복하다고. 혜림이도 너무 좋은 계획이라며 대찬성이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하루 2만 보 걷기는 귀국과 동시에 종료되었다. 어느 지역 어느 카페를 갔는지를 구글 지도에 표시를 하다 보니 나의 런던 구글맵은 난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시내 중심부를 벗어나 런던의 사방팔방 외곽 동네를 순회하는 즐거움을 얻었다. 4월부터 9월까지 하루에 2만 보 이상을 걸은 날은 대략 60여 일. 180일 중에 1/3, 그러니까 이틀에 하루꼴로 2만 보 걷기를 한 셈이다. 처음의 계획을 지키지는 못했다. 맹장도 터지고, 백신도 맞고, 논문도 쓰고 이유(라고 쓰고 핑계라고 읽는)는 많았다. 그리고 구글 지도에 런던 카페 리스트에는 가본 곳과 가보지 못한 곳이 섞여 있지만 약 100여 곳의 카페가 저장되어 있다. 이 카페 리스트의 일등 공신은 혜림이다. 나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카페 맛집을 찾는 혜림이에게도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었기를 바라면서... 


'그러니까 나는 장충동을 몰랐던 거다.

한 번도 걸어보지 않았으니까.


직접 걸어야만 비로소 그 길을 알게 되고

천천히 걸어야만 보이는 풍경이 있다는 걸

밤을 걷는 내내 깨닫고 또 깨닫는다.'


- 밤을 걷는 밤 중에서, 유희열 저 


나도, 그렇게 런던을 느꼈다. 리틀 베니스, 이스트 핀츨리, 크라우치엔드, 달스턴, 패딩턴, 캐나다워터, 해링게이, 노팅힐, 버몬지, 풀함, 크로이던, 콜린데일, 악톤, 하이버리, 푸트니, 넌헤드, 덜위치, 브릭스턴, 와핑, 그리니치, 해크니 등등. 이런 동네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곳들을 열심히 다녔다. 8월부터는 영국을 느끼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노던 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옆 나라 아일랜드의 더블린, 잉글랜드의 리버풀, 캔터베리, 케임브리지까지 열심히 열심히 다녔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2만 보 걷기의 기록들, 나만의 해시태그 #오늘도걷는다2만보

걷고 또 걷고. 걷다 지칠 땐 커피 한 잔으로 숨을 돌리고.

가끔은 그 동네 미술관이 목표가 되기도 하고, 공군 박물관에서 전투 비행기를 실컷 보기도 하고.

골목골목의 상점들을 들러 기념품을 사모으고, 때로는 공원에 앉아 그저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10여 년 전의 추억이 서린 동네에서 옛 흔적을 찾아보기도 하고, 높은 곳에 올라 런던을 조망해보기도 했다.

어느 날은 날씨가 너무 화창해서 손이 새카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걸었고, 어느 날은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기면서 걷고, 어느 날은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그래 이게 런던이지~ 하며 걸었다.   


그렇게 런던은 내게 동네 동네 골목골목 이렇게 다름을 그러면서도 런던임을 보여주었다. 그런 런던이었기에 나 역시 걸어야만 보이는 모습들을 사진 속에 최대한 담기 위해 노력하면서 걸었다. 이제, 언제 다시 런던에서 오늘도 걷는다 2만보를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러나, 런던은 지금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 거리는 또 달라질 것이다. 

언제든 다시 와서 걸으라고. 다시 오게 되면, 또 다른 런던을 보여주겠노라고.  


그러니까 우리, 곧 다시 만나

고마웠어, 나의 도시, 나의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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