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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달꽃 Aug 26. 2020

지갑 없는 남자가 용산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타려면

"저기, 죄송한데 제가 현금 드릴 테니까 카드 한 번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여자들이 경계 어린 표정으로 서로를 힐끔거린다.

"지금 제 폰 배터리가 1퍼 남았는데 요 앞의 충전기 대여기가 카드 결제만 되더라구요. 근데 제가 오늘 지갑을 잃어버려서 ATM에서 뽑은 현금밖에 없어요."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표정이나 여전히 주춤거리는 태도에 나는 재빨리 덧붙인다.

"저기 바로 코앞인데 같이 가서 확인해 보셔도 돼요."

무리 중 한 명이 "제 거 쓰세요."라는 말과 함께 지갑을 들고 일어난다. 혼자 보내기가 영 불안했는지 옆 사람도 덩달아 일어난다. 나는 감사를 표하며 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 두 장을 건넨다. 충전기 대여기까지는 불과 20보다.

"고향 내려가시는 거예요?"

캐리어에 백팩과 에코백까지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내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아뇨, 친구들이랑 부산 여행 가기로 했었는데 저만 혼자 늑장 부리다가 낙오됐네요. 서울에서 자취방 빼는 데도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데 도중에 지갑까지 잃어버렸으니……. 내일 첫차 올 때까지 여기서 존버하려구요."

"어, 저희도 여행 가는데. 여기서 밤 새다가 첫차 탈 거예요."

이 정도 전개까지는 너무 갔고, 어쨌든 공손히 부탁드리면 저 분들께 도움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몇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고 결심을 굳히는 순간, 언제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었냐는 듯 일행들이 일시에 일어난다. 어, 그래, 잘 가. 반대편으로 향하는 서로를 배웅하며 그들은 쿨하게 헤어져 버렸다. 긁적.

하릴없이 역 안을 돌아다니던 중 다행히 아까 발견하지 못했던 콘센트 책상을 찾았다. 와, 헛돈 날릴 뻔했네. 가방 속 옷가지들을 이것저것 꺼낸 끝에 바닥에 묻혀 있던 충전기를 손에 쥐고 경쾌한 덜컥, 소리와 함께 꽂아 넣는다. 장시간 콘센트 사용을 삼가달라는 안내문이 눈에 띄지만 어차피 이 시각의 용산역은 허허벌판. 캐리어를 의자 삼고 노트북에 무료 와이파이를 연결하면 24시간 카페가 부럽지 않다. 넷플릭스 몇 편으로 남은 6시간은 거뜬히 때우리라.

"고객님, 이제 마감 시간이라 나가셔야 돼요."

"여기 24시간 개방 아니었어요?"

"네, 아니에요."

한창 드라마에 몰입해 있을 무렵 역내 직원에게서 들려온 청천벽력 같은 통보. 분명히 아까 인터넷에서 용산역은 24시간 개방이라는 정보를 찾고 안심했는데. 지식in은 자신을 맹신한 이용자에게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억울하면 스스로 배우는 수밖에.

"혹시 이 근처에 24시간 카페 같은 곳 없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옆의 직원이 카페는 없지만 바로 근처가 찜질방이라는 정보를 말해준다. 고맙지만 그다지 유용하진 않은 정보다. 가뜩이나 현금 몇 푼으로 친구들과의 조우 전까지 버텨야 하는 판에 찜질방이라니. 게다가 지금은 새벽 1시고 내가 탈 열차 출발 시각은 5시 반. 네 시간 반만 뻐팅길 목적으로 이용하기엔 가성비가 영 별로다.

"그럼 여기 다시 오픈하는 시각이 언제예요?"

"네 시 반이요."

세 시간 반 정도면 야외에서 존버할 수 있지 않을까? 주섬주섬 짐들을 챙긴 후 별 생각 없이 가장 가까운 2번 출구로 나왔다. 아이파크몰이라는 명색이 거창하지만 문을 연 상가는 24시간 편의점뿐이다. 요깃거리 구할 방도가 있기야 한 것이니 이 정도면 행운이다. 더군다나 신호가 좀 약하고 가끔 끊기긴 하지만 와이파이도 잡힌다. 아까 보던 드라마도 이어 볼 수 있겠다.

긴 벤치 끝에는 한 할아버지가 박스를 펴 놓고 그 위에 누워 단잠에 빠져 있다. 저 할아버지에겐 야외에서 지새는 밤이 일상이려나. 잠깐 내게 낯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얼마 안 가 별 성과 없이 진부하게 끝나고 만다. 그들에 대해 아는 바도 없을 뿐더러 드라마가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저씨, 일어나세요. 역 열렸어요."

드라마가 끝나고 남는 시간에 편의점에서 라면 하나를 사서 부숴먹으니 4시 반은 금방이었다. 벤치 할아버지의 잠을 낭랑하게 깨우는 목소리에 내 시선 또한 활짝 열린 문으로 향한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마스크 위의 김 서린 안경 너머로 피로에 붉어진 눈을 멍하니 바라본다. 오늘 여행 잘 즐길 수 있겠지. 기차에서 잠깐 눈이나 붙이고 말겠지만 왠지 모르게 조금 자신이 있다. 아침을 맞는 이들이 흔히 느끼곤 하는 착각의 일종일까, 그저.

예의 콘센트 책상에서 노트북을 충전하고 짧은 기록을 남기는 동안 어느덧 첫차 시간이 되었다. 무거운 짐들을 낑낑거리며 이고 끄는 탓에 마스크 안쪽은 말할 것도 없고 티셔츠에 철썩 달라붙은 가슴까지 온통 땀범벅이다. 내가 탈 열차는 어디 있나. 어라라, 용산역이 아니라 서울역 출발이구나. 하하하. 이 놈의 상시 고장인 머리를 어찌할까나.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가지고 계신 승차권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제의 나, 왜 이리 바보 같았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어제만 바보였다고 내심 착각하고 싶었나 보다.



2020. 0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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