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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ㄷㅣㅁ Sep 12. 2023

고시 그 이후.

사라지고 싶은 나날들

    결과 발표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어렵게 일상을 살아내려 노력하고 있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 


    결과 발표 자체보다는 그걸 기다리는 이 시간들이 미치도록 고통스럽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든다. 

    엄청난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이미 날 집어삼켜 누군가가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그것들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엄청나게 강력한 마취제가 있다면 맞고 싶을 정도. 왜 곰이나 호랑이 등 대형야생동물을 치료 또는 종 보존을 위해 포획할 때 쓰는 그런 마취총. 그것보다 배는 강력한 마취총에 맞아 결과발표일 발표시간에 맞춰서 눈을 뜨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술에 진탕 취해서 '내가 다시 술을 마시면 개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숙취를 경험한다면 이 고통이 잊혀질까도 싶다. 대학생 때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토 한 번이면 다음날 1교시 수업도 갈 수 있었는데, 나이를 한두 살 먹어갈수록 숙취가 배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하다. 이전에는 속이 메슥 거리기만 했다면, 이제는 깨질 듯 한 두통과 온몸에 모래주머니가 달려 이 세상 중력이 모두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 그리고 내가 취한 동안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게 아닐까 의심가는 근육통까지. 종합선물세트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그 무자비한 숙취의 고통이 맨정신에 이 나날을 보내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다 느껴지는 요즘이다.. 부모님은 별다른 내색은 하지 않으시지만, 그리고 함께 살고 있지 않지만 누구보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할머니와 이모도 다들 말은 안 하시지만, 나만큼이나 조마조마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거다. 

    나를 응원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그나마 이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가슴이 미어지고 숨이 막히는 이 고통을 그들에게까지 겪게 한다는 사실에 너무 미안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냥 이런 모든 생각들이 다 잊혀지도록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다. 




    서울 내에 사라질만한 장소가 있을까 찾아보았다. 누군가 한 명쯤은 나와 비슷한 감정으로 숨을 곳을, 사라질 곳을 찾아봤을 법도 한데, 관련 포스팅이 없다. 


    정확히 사라져서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래도 당장의 이 현실을 잊게 해 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건 확실하다. 일단 늘 있던 곳에서 벗어나면 늘 하던 생각들이 잠시나마 잊혀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든다. 


    템플 스테이를 할까 고민했는데, 너무 조용한 곳에 가면 괜히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것 같다. 그리고 휴식형 템플 스테이에서 제공하는 '스님과의 대담 시간'... 아마 울음바다가 될 것 같다. 

    극 f인 나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일어날법한, 아니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일마저 모두 상상하곤 하는데, 예상치 못한 대담자의 울부짖음에 스님이 얼마나 당황하실까 상상이 든다. 


    그렇다고 엄청 시끌벅적한 곳을 가고 싶은걸까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니다. 군중 속의 고독함은 내가 선택한 고독일 때는 섹시하지만, 원치 않는 고독일때는 비참하다. 그래서 혼자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다. 근데 괜히 잠수를 타 가지고는. 연락할 사람도 없다. 

    친하고 내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 기대기보다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고 만난 사람들(나의 가족과도 같은 소수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은 오히려 나와 덜 친한 사람들이다. 내게 기대하는 바가 크게 없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크게 두렵지 않고 부담도 되지 않는다. 

    어쨌든, 흉흉한 세상 속에서 여성이 단둘이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실 수 있는 상대는 여성이거나 혹은 아주아주 가까운 남성 지인인데. 가족과 같은 내 분신들은 모두 바쁘기도 하고, 이제 더 이상 그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나의 분신과도 같은 그들은 함께 고통스러워할 것이므로... 이 고통을 나누고 싶지 않다.

    이들을 제외하고 그다음으로 친한 지인들에게는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 덜 친한 사람들은 나의 진상짓을 감당하기엔 좀 먼 관계이다.  


    결국 그렇게 하나 둘 거르다보면 아예 술에 절어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다는 바람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에 다르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애써 긍정적으로 사고회로를 돌려보면, 내가 인생에서 언제 또 이런 시간을 경험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나중에 비슷한 시간을 견뎌야 할 때가 온다면, 이미 젊을 때 한 번 경험해보았으니 그때의 나는 고통을 완화시키는 법을 알지 않을까 싶다가도, 그러려면 지금의 이 시간을 내가 일단 잘 이겨내야 할 텐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다. 




    잠이 잘 안 온다. 어제는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애써 잠을 청하다 뭔지 모를 울컥하는 것이 목구멍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아 울기로 작정하고 내 눈물버튼 영화를 봤다. 

<Me Before You>


    적당히 울음에 대한 핑계를 만들고 나면, 영화의 슬픈 장면이 나오기도 전에 냅다 울어재낀다. 서럽게 한참을 울고, 영화가 슬퍼서 울고. 그렇게 울었더니 2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도 잠이 오질 않아 한참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다가 아침을 맞는다. 


    아침이 되면 이상하게 오히려 잠이 더 잘 온다. 이미 환해진 세상은 내게 어떠한 해도 가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원치 않는 낮잠을 자버리고 나면 오후가 된다. 

    야속하게도 기업들의 하반기 공채 서류마감일이 합격발표일과 얼마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에, 혹시라도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때 내년 상반기 공채까지 백수가 되지 않기 위해 자소서를 쓰러 어슬렁어슬렁 카페에 간다. 나름 쓴다고 쓰고 있기는 한데, 집중이 너무 안 된다. 




    내가 이 시간을 정말 잘 극복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언젠간 나와 같은 고통을 헤쳐나갈 누군가가 나처럼 인터넷 속에서 위로를 구하거나 답을 찾고자 헤맬 때 내 글을 보고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 (이 글 말고 내가 somehow 이 시간을 극복해서 올리게 될 글...)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시간들을 견뎌낸 기록들은 없으니까. 내 기록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싶다. 


    일단 잘 견뎌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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