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05 빅뱅 - 맨 정신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많은 사람들이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3년 차 꾸준히 수요일마다 발행해오던 글을 놓쳤다. 뒤늦게 알고 멤버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다음 주에 꼭 발행하겠다 했지만 그다음 마감일도 지키지 못해 며칠을 넘겨버렸다.
핑계야 여럿 있었다. 코앞으로 다가온 행사 준비로 인한 바쁨, 이사 준비와 실행으로 인해 정신없던 한 주, 일과 집을 반복하다 보니 찾아온 체력적 위기와 함께 온 무력감 등등. 그러다 최근 부업으로 해오던 업무에 관한 논쟁이 생긴 것은 글을 쓰지 못하는 핑계에 한층 더 불을 붙였다.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한 이 일은 '손해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해 법적인 문제로 갈 여지까지를 남겨 두어 며칠 내내 골머리를 앓게 했다. 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가 급격히 쪼그라들어 몇 날 며칠 제대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예민한 위인데, 최근 며칠을 거치며 이 녀석은 거의 활동을 쉬겠다고 휴직계를 내버렸다.
문제를 해결하느라 식음을 전폐하고 종일 이 문제에 매달렸다. 이 논쟁에서 나의 책임과 의무가 얼마나 있는지, 법적인 부분까지 갔을 경우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했다. 그 와중에 다가오는 행사 준비도 해야 하는 등 여러 일들이 겹치니 예민함과 불안함이 극에 달해 일상생활이 되지 않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게 왜 니 책임이야? 배 째라 해도 그만인데? 왜 그렇게 스트레스받는지 모르겠다. 무시해!"
끙끙 앓는 나에게 주변인들의 대부분은 이렇게 얘기했다. 나를 위해 사방팔방으로 알아봐 준 사람들이 고마웠으나, 그런 말에도 불안은 좀처럼 가시지를 않았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원만하게 해결해보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하루라도 더 끌었다간 스트레스가 일상을 잠식해버릴 것 같아 그들의 말처럼 '배 째라' 식으로 무시해보려 일방적 메시지를 보내고 귀를 닫았지만 일상 회복은 여전히 어려웠다.
'나는 왜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일까?'
문제의 원인은 내 '실수'였으나, 상대방이 요구하는 부분에 내가 져야만 할 '책임'이 있지는 않았다. 관례상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었고 털어버리면 그만이었으나, 계속 스트레스를 받았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불안하고 괴롭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고 혼자 터덜터덜 걷다가 깨달았다. 나는 자책에 빠져 있었다.
'애초에 내가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 일을 내가 받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계약서를 작성했더라면.'
좀 더 당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을 텐데,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지 않았을 텐데, 내 본업과 일상을 좀 더 프로답게 유지해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것.
몇 달 전부터 시달려오던 것이었다. 스스로 알던 원래의 나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하겠다'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에 책임과 부담이 커지는 위치가 되자, 해낼 수 없는 수준의 과업이라고 생각되면 '절대 못한다.', '이러면 큰일 난다.'는 식의 업무 회피를 해오곤 했던 것이었다. 그 말을 하는 자체도 스스로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는데, 또 생각보다 이 일이 빨리 쉽게 해결되는 결과를 마주하는 경우엔 민망해지곤 했다.
'아이가 불안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무기는 자기 신뢰감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신뢰하고 자기 확신을 갖고 불안을 다뤄냅니다.'
오은영 박사님의 말은 아이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해당하는 얘기였다. 마음이 불안해질 때면 웬만한 일은 해낼 수 있다는 자기 확신을 되뇌었다. 생각보다 나는 더 빨리, 잘,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기 확신이 생기고 나니 부담감과 예민함은 낮아지고 여유가 생겼다. 팀원들을 다그치기보다는 보듬을 수 있는 포용력이 생겼고 조급해지다가도 금세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게 되었다.
'할 수 있으면서 뭘 조급해해. 너 할 수 있어. 천천히 해봐.'
그렇게 자기 확신에 가득 차오던 나날로 불안을 다스리던 와중에 찾아온 이번 일로, 차곡차곡 쌓아오던 자기 확신의 탑은 와르르 무너지고 자책과 회고를 반복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또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불안을 이기는 방법은 '자기 확신' 이외에도 '공감과 지지'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불안을 이기는 완전한 무기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 이것은 '자기 확신'을 뒷받침해주는 보조제 역할을 한다. 지난 며칠간 멘털이 무너져 있던 나에게 주변 사람들은 많은 지지를 보냈다. 설령 완전히 공감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도 '그건 너의 실수이니 자책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나를 자책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노력해주었다. '너 당황하고 화나면 말 제대로 못하잖아. 무조건 글로 남겨' 라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들도 있었고 대신 싸워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자기 확신은커녕 서른이 다 되어서도 문제 해결도 못한다는 자기혐오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적어도 문제를 안고 끙끙대기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덮어둘 건 덮어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이제야 조금 내려놓고 점심에 순댓국을 입에 넣었다. 여전히 밥은 반공기도 못 밀어 넣었지만 꾸역꾸역 먹고 소화를 시키려 한두 시간을 걸었고 저녁엔 맛있는 술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바를 찾았으니 몸이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노력을 하는 중이 아닐까.
이번 주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 추천곡은 '맨 정신 - 빅뱅'입니다. 인생에서 술이 필요할 때가 있죠. 혼술은 거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어느 날은 누군가와 이야기하면서 마시다가는 기분 탓에 실수라도 할 것 같아, 혼자서 조용히 마시고 취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 오랜만에 빅뱅이 신곡을 들고 등장했습니다. 그 노래를 듣다 보니 예전 노래들이 듣고 싶어 찾아보다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된 노래인데, 신나는 비트와 멜로디로만 여겼던 곡이 지금 그들의 상황을 빗대어 보니 왜 이렇게 씁쓸하게 느껴지던지요. 한 때 추억을 아름답게 만들어준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림도 그려보며 추억 여행을 했었어요.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추억 여행을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