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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Aug 25. 2022

내가 널 다시 만난다면

ep. 120_이웃집 토토로 (이웃집 토토로 OST)

5주년 기념이라며 남자 친구와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좋은 자리를 예매하려고 새벽부터 사이트에 접속했다던 남자 친구는 아주 좋은 자리를 예매했다고 몇 주 전부터 뿌듯해했다. '얼마나 좋은 자리길래?'하고 공연장에 도착했는데 지휘자의 뒷모습이 정면으로 보이는, 무대에서 겨우 3열밖에 안 떨어진 특급 좌석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오케스트라 공연인데 이렇게나 좋은 자리라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즐겨보는 편은 아니었다. 가끔 부모님이 예약한 시립교향악단의 무료 공연을 따라가서 본 적은 있었지만 내가 가고 싶어 먼저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 간 적은 처음이었다. 이 공연을 꼭 봐야만 했던 이유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모든 음악을 작곡한 '히사이시 조'의 영화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만으로도 시간을 오래전 어느 여름날로 순간 이동하게 하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니까.



장내에 불이 꺼지고 지휘자가 인사를 하자 관객들의 박수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다. 고요한 적막에 이어 지휘자의 손짓을 시작으로 전주만 들어도 유명한 곡들이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의 소리를 통해 겹겹이 쌓이며 웅장함을 피워냈다.

노래를 감상하는 긴 시간 동안 공연장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혹시나 소음이 될까 다들 옴짝달싹 안 하고 공연을 감상했다. 나 역시 숨을 죽이고 연주자들의 표정과 손짓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잘 모르는 곡에서는 살짝 나른해져 마스크 아래로 조용히 하품을 하며 고요의 시간을 즐겼다.


약간 나른해질 때 즈음 새로운 곡이 시작되었다. 순간 머리가 쭈뼛하면서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그 곡은 '이웃집 토토로'의 OST인 「이웃집 토토로」였다.



https://youtu.be/EcSF8lwihe4


「인생의 회전목마」나 「또다시(Hutatabi)」처럼 아련하고 감상적인 곡이 아니라 시작부터 악기들의 리듬과 선율이 신나게 치고 나오는 「이웃집 토토로」에서 눈물이 터질 줄이야.(그렇다고 엉엉 울진 않았다) 어린 시절 토토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었으면 또 모르련만, 내가 이웃집 토토로를 본 것도 서른이 되어서였다.



 




「이웃집 토토로」가 한국에서 재개봉한 (2001년)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자매  언니인 '사즈키' 나이가 비슷했다.  당시 토토로의 인기는 어마어마했어서 친구들은 가방에 토토로 인형을 달고 다니거나 대왕 토토로 인형에게 침대 한편을 내어주기도 했는데 나는 그때  영화에 흥미가 없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메이의 옥타브 높은 목소리가 듣기 힘들어서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5분도 안돼서 꺼버린 기억이 있다. 그렇게 친구들 사이에서 이웃집 토토로를 보지 않은 드문 한국인으로 자랐고 토토로가 토끼인지 고양이인지 알지 못한  서른이 되었다.


이웃집 토토로를 다시 만난 건, 점심을 먹고 바닥에 누워 영화나 한 편 볼까 넷플릭스를 뒤지던 중이었다. 영화 목록에서 그 녀석을 다시 만났다. 그날은 왠지 토토로가 보고 싶어 바닥에 누운 채로 영화를 끝까지 다 봤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한참을 깊은 여운에 빠져 있었던 나는 어린 시절 토토로를 만나지 않은 것을 잠시 후회했다. 그때 토토로를 만났더라면, 서른이 된 지금 다시 그 녀석을 만났을 때 얼마만큼의 벅찬 반가움이 있었을까? 마치 실제 영화 촬영이 끝나고 몇십 년 후, 훌쩍 성장한 '메이'역의 배우가 '토토로' 역의 배우를 만났을 때 늙지 않은 그를 보고 벅찬 감동을 느끼듯이!



1988년에 나온 이 영화는 3대에 걸쳐 본 가족이 있을 만큼 긴 역사를 지나왔다. 20대에 이 영화를 봤다면 아마 그의 자식, 손자까지 영화를 보고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말이다. (영화 속 자매 중 언니인 '사츠키'가 1941년생이라고 한다!) 어린 손자는 '메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영화를 볼 것이고 그의 부모는 영화 속 아픈 엄마 또는 간병하는 아빠의 마음으로, 할아버지는 그 영화를 보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나도 10년 뒤, 영화 속에 나오는 두 아이의 엄마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또 어떤 인물의 감정에 공감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좋은 작품은 세월을 입을수록 저마다에게 특별하게 남아 풍부하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가끔 만화영화가 어린이가 아닌 어른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영화를 만드는 어른들이 어린 그들의 순수함을 빌려 미래의 자신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담아내는 게 아닐까.


영화의 리뷰에 [아이는 웃고, 어른은 울다]라는 평이 있어 공감을 했다. 이웃집 토토로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눈물이 핑 도는 건 단순히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란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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