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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Oct 06. 2023

샤워 30분 하기 프로젝트

Long Long Shower Project


어린 시절 티비를 보는데 어느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카메라에 대고 말했다. “ㅇㅇ언니는요. 샤워를 진짜 오래 해요. 한 번 들어가면 한 시간은 있는다니까요.” 그러자 그 말을 들은 ㅇㅇ언니가 맞받아쳤다. “보통 샤워 다 한 시간씩 하잖아!” 그리고 따라온 동생의 답변.

“누가 샤워를 한 시간씩이나 해! 30분이면 끝나야지.”


스무 살 무렵 봤던 이 별 것도 아닌 대화가 아직 기억에 남는 이유는 그때 느꼈던 충격 때문일 것이다.


‘샤워를... 30분을 한다고?’





그 뒤 정말 다른 사람들은 샤워를 30분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다들 그렇다고 하면 30분 샤워를 안 하는 내가 이상해지니까 대놓고 물어보진 못하고 ‘아이돌 ㅇㅇ은 1시간 샤워를 한다던데?’하고 물어본 기억이 난다. 그러면 보통 ‘와, 그 정도는 아니다. 30분이면 끝나지.’ 같은 반응. 혹시 여자애들만 그럴까 싶어 남자애들한테 물어봐도 자기는 한 시간 동안 샤워를 한다는 애도 있었다. 샤워기 아래에서 푸시업이라도 하냐고 물었더니 물만 맞고 10분 넘게 서 있는다고. (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씻는 것에 박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청결해 보이지 않을 테니 다시 말해야겠다. 나는 씻는 시간이 아까웠다. 뭔가에 몰두해 재밌는 걸 하다가 그 흐름을 끊고 씻으러 가는 게 너무 괴로웠다. 특히 언니랑 같이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엄마가 먼저 씻으라고 하면 내가 씻는 동안 언니 혼자서 신나게 컴퓨터를 쓸 생각에 초스피드로 씻고 나오던 때도 있었다.

그러기 위해 욕실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효율적인 플로우로 전 과정을 가동하는 것이 중요했다. 세수하면서 동시에 몸을 씻고 헹구면서 양치하기와 같은 극강의 효율적인 세척 과정. 빨래를 ‘표준’으로 놓고 시작 버튼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쾌속’에 놓고 시작함으로써 1시간 30분이 걸릴 빨래를 30분 만에 탈수까지 끝내는 것처럼.


빠르게 씻는 게 습관이 되다 보니 출장을 가서 동료들과 같은 호텔방을 쓸 때도 제일 먼저 씻는다. 늦게까지 일하고 숙소로 들어와 다음 날 아침 일찍 나가야 할 때 다들 ‘언제 돌아가면서 다 씻고 자나’ 걱정하면 나는 걱정 말라며 ‘10분 컷’을 하고 나온다. 화장을 지우고 샤워까지 다 하고 양치를 끝내면 딱 10분. 이렇게 빨리 씻는 게 어느샌가 습관이 되어 버렸다.



빨리 씻게 된 계기는 처음에도 말했듯이 씻는데 드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였다. 빨리 씻고 욕실을 탈출하고 싶어서 물기를 닦자마자 쏜살같이 욕실에서 튀어 나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몸에 물을 칠하고 얼굴과 몸을 문지르고 헹구는 과정이 왜 그렇게 아깝고 지루하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우울함이 몰려올 땐 딱 두 가지는 꼭 하세요. 청소, 그리고 샤워.]


무기력함을 어찌 알고 귀신같이 돋보기 피드에 뜬 한 카드뉴스에서 청소와 샤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래, 뭔가에 몰두하고 싶을 때 청소는 부지런히 하면서 왜 내 몸은 그렇게 대충대충 관리하는 거야?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 혼자만의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명 <샤워 30분 하기 프로젝트>. 누군가는 들으면 어이가 없을 프로젝트이지만 누군가는 공감할 이야기일지 모르니 여기다 살짝 남겨본다.






집에 오자마자 바로 욕실로 들어가기

나처럼 씻는 시간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퇴근 후 이것저것 할게 많아 시간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 운동도 해야 하고 내일 점심 도시락도 싸야 하고 못 본 SNS도 봐야 하고 일기도 써야 하고... 뭔가를 한창 하다가 마지막 순서로 씻으러 가려면 피곤함이 몰려와 대충대충 씻게 된다. 그걸 방지하려면 일단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욕실로 직행하자.



샤워시간을 즐겁게 해 줄 30분 영상 준비하기

욕실에 발을 들여놓기 전 씻으면서 볼 영상을 고르자. 음악을 듣는 것도 좋겠지만 나에겐 욕실에 머무는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요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심각한 내용이나 정보전달을 위한 콘텐츠보다는 씻는 시간 자체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좋다. 그런 의미에서 예능 한 편 정도가 적당하다. 옛날에 즐겨보던 어린이 만화도 좋다.(이누야샤 같은 건 25분이면 한 편이 끝난다.)

여름에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면 땀이 주르륵 쏟아져 당장이라도 욕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찬 물을 뒤집어쓰고 싶어 진다. 하지만 그럴 때마저 대충 찬물 샤워를 하고 나오지 않으려면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신중히 영상 하나를 골라야 한다. 그리고 영상을 재생하는 동시에 샤워의 첫 번째 단계부터 차근차근 진행한다. 이 30분을 꼭 채우겠다는 수행의 마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바디워시 고르기

화장품이나 옷은 좋은 걸 고르지만 내 몸에 닿는 바디워시, 바디로션은 1+1 또는 대용량 할인 제품을 사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일 선물로 친구가 준 자몽향 바디워시를 쓰면서 샤워하는 시간이 즐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용량이 적고 가격이 비싸 평소 같으면 내가 직접 사지 않을 제품이었지만 선물을 받은 김에 써본 그 바디워시와의 만남이 매일매일 기다려졌다. 그 뒤 바디워시가 떨어져 가면 다음은 무슨 향을 살까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었다.

바디워시를 스펀지에 조금 짜서 몽실 몽실한 거품을 내면 귀여운 비눗방울이 피어오르면서 상큼한 향기가 욕실을 가득 메운다. 좋은 향은 욕실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려주고 잔향은 오래 남아 잠드는 시간까지 기분 좋게 해 준다.


스크럽과 바디로션 바르기를 미션처럼

기본적인 양치, 세수, 거품놀이까지 마치고 나면 약간 힘들어져 얼른 욕실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어 지지만 이때 조금 더 머무르게 하는 두 가지 미션이 있다.

첫 번째, 몸을 닦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바로 바디나 페이스 스크럽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한번 더 함으로써 5분은 더 체류시간(?)을 늘릴 수 있다.

물기를 닦고 나면 마지막 미션이 기다린다. 여름이나 겨울이나(특히 겨울에 더 신경 써서) 바디로션을 발라주는 일. 이건 나만 귀찮아하는 게 아니었으니, 돈을 걸고 루틴을 지키는 앱에서도 ‘매일 바디로션 바르기‘가 있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귀찮음을 이기고 바디로션을 바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일상에서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즉흥적인 성격이라 그런 건 절대 안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하나 하루의 일과를 짚어보면 분명히 하나쯤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보통 ‘루틴’이라고 부르지만 나의 경우는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루틴이 아니라 의식하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프로젝트’에 더 가깝다.


작은 프로젝트들은 매일의 조그만 성취를 이룰 계기를 만들어주고 그로 인해 습관이 되어 쌓인 루틴은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 되어주니까. 오늘부터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자.




(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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