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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Nov 30. 2021

리나




같은 방향을 보고 2열로 길게 늘어선 남색 시트가 정갈하다. 적당한 조도에 신뢰감을 주는 청결한 냄새까지 난다. 리나는 선반에서 9A라는 좌석 표시를 찾아 뻣뻣하게 굳어버린 몸을 어색하게 구부려 앉았다. 옆 자리 주인이 있을지 몰라 가방은 옆에 내려놓지 않고 무릎에 올려 쥔 채였다. 등받이에 기대지도 못하고 허리를 곧게 세운 자세가 시험지를 기다리는 수험생 같았다. 


출발 시간까지는 5분도 채 남지 않았다. 텅 비어있던 공간의 적막을 깨고 낮은 목소리의 일본어가 들렸다. 마스크를 쓴 여자 셋이 들어왔다. 찬 기운을 잔뜩 몰고 들어온 그들은 멀지 않은 곳에 앉았다. 3B, C, D 정도이려나.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힘없는 목소리는 자리를 잡고 안전벨트 매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멎었다. 


이윽고 출입문이 닫히고 출발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 열차는 별 소음도 없이 가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게 공항가는 인원의 전부인 모양이다. 리나는 그제야 가방을 옆 자리에 올려두고 굳어져 무거운 머리를 등받이에 풀썩 하고 기댔다. 왼쪽 눈 깊숙한 곳이 맥이 뛰듯 욱신거리며 조여 온다. 오히려 오른쪽 눈은 찬바람이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맑고 또릿하다. 편두통약을 가방에 넣었는지 캐리어에 넣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 리나는 창틀에 괸 팔로 왼쪽 관자놀이를 지긋하게 누르며 천천히 눈만 깜박였다. 


참 오랜만이다 기차는. 공항철도니까 엄밀히 말하면 고속전철이지만. 어쨌든 리나가 기억하고 있는 기차의 형태와 닮아있다. 시작과 끝이 같아 좋군. 예상도 하지 못했던 생각이 툭 하고 튀어 올랐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게 기차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물론 그건 진짜 기차였다.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오래된 녹색 시트에 불특정다수의 체취가 짙게 배어버린.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대찬 소음에 비해 차창 밖을 달리는 자동차들에 한없이 뒤쳐지기만 해 이게 제대로 달리고 싶은 게 맞나 싶은. 두려움과 메스꺼움을 창백한 얼굴 뒤에 감추고 정차역 안내방송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던 그 낡은 기차.


일곱 살 나이에 홀로 탔던 기차는 리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물론 지금의 인생이 일곱 살 이후로 바뀐 인생이라는 건 리나만 아는 사실이다. 이제는 엄마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외로움 속에 길길이 날뛸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열차는 날카로운 빛과 함께 지상으로 빠져나왔다. 며칠 전 올겨울 들어 가장 큰 눈이 내렸다. 올라가지 않는 기온에 녹을 새가 없었던 눈은 가느다란 풍경을 무겁게 짓눌러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다. 뚜렷한 아침 햇살도 두텁게 쌓인 눈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외할아버지는 치울 겨를도 없이 발목까지 쌓인 눈을 신발도 채 꿰어 신지 못하고 휘청휘청 밟으며 뛰듯이 리나를 맞았었다. 눈에 파묻힌 외할아버지의 맨 발목은 참 검고 앙상했다.


리나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 엄마와 단둘이 살던 서울 대림동에서 강원도 춘천의 외할아버지 댁까지 혼자 찾아갔던 사건은 그 후로 몇 십 년 동안이나 엄마의 단골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이름처럼 영리하고 예쁜 내 딸. 자랑스러운 내 딸내미. 시댁이랍시고 그 마귀같은 노인네들이 돌림자니 뭐니 하며 효원이니 정원이니 같잖은 이름들을 들이댈 때에도 내가 꿋꿋하게 리나로 밀어붙이길 잘했지. 사람은 무조건 이름대로 사는 거거든. 그렇게 살게 되어 있어. 세상 천지에 우리 둘만 남았다 해도 엄마는 이렇게 영리하고 예쁜 딸이 있어서 아무 걱정 없어. 우리 리나는 엄마 귀한 줄 아는 애니까. 그런 애니까.


통증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리나는 가방을 뒤적였다. 파우치 안에도 약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캐리어 안에 넣었나보다. 왼쪽 눈은 제대로 뜨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다. 그녀는 눈을 피해 처마 밑에 웅크린 새처럼 가만히 숨만 달싹였다. 


엄마의 인생은 가혹한 편이었다. 춘천에서 자그마한 옷가게를 꾸렸던 엄마는 몇 번의 선을 마다하고 우연히 봄꽃놀이에서 만난 서울 남자와 사랑에 빠져 무작정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 방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공간에 신접살림을 차렸고, 식을 올리기도 전에 리나를 임신했고, 트럭을 몰아 전국을 돌며 짐을 나르던 남자는 리나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마찬가지로 봄꽃놀이에서 만난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져 돌아오지 않았다. 뻔하고도 재미없는 이야기다. 


그 이후 식당 주방에서 일했던 엄마는 무릎에 물이 자주 차고 아파 한 군데서 오래 일하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돈 나올 구멍은 자주 막혔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우리 딸 죽게 둘 순 없다며 발목이 앙상한 외할아버지에게 우는 소리를 하거나, 전화번호가 자주 바뀌어 몇 번의 수소문을 거쳐야 겨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친할머니에게 당신 손녀 책임지라고 악을 쓰곤 했다.


몇 십 년의 인생에 통째로 엄마라는 핑계를 달긴 우습다. 어쩌면 일찌감치 얼굴 모를 다른 년이랑 도망가 소식이 끊겨버린 아빠라는 남자도 핑계가 되어줄 수 있겠고, 사사건건 편모가정이라 걱정 반 의심 반의 눈짓을 보낸 학창시절 선생님들도 핑계가 되어줄 수 있겠다. 어쩌면 제일 큰 핑계는 엄마의 나약함을 지나치지 못하고 제 능력 밖의 것들로 안심시킨 자신의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리나는 약해진 엄마를 내버려두지 못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너뿐이라는 엄마를, 춘천까지의 길을 혼자서 찾아갈 정도로 똑똑한 딸이 있으면 어떻게든 살아날 구멍이 있을 거라는 엄마를. 그래서 리나는 거짓말을 일찍 배웠다. 


시험 점수를 고치는 건 당연했다. 형편없는 점수가 아닐지라도 색연필로 수정이 가능한 숫자 모양이라면 무조건 더 높은 점수로 고쳤다. 엄마는 서툰 솜씨로 고친 흔적을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그저 리나의 엉덩이를 두들기며 초점 없는 눈으로 ‘그래, 네가 이렇게 똑똑한 애지. 우리 이쁜 딸.’ 해버리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정직하게 실력이 늘었다. 입 밖으로 꺼냄과 동시에 뒷받침이 될 만한 배경과 서사가 머릿속에 펼쳐졌다. 이미 한 거짓말과 할 거짓말의 앞뒤가 맞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설득력을 주려면 간혹 자잘한 실패에 대한 거짓말을 섞는 것도 필요했다. 예를 들어 ‘엄마, 나 반장 됐어.’라는 거짓말도 필요하지만 ‘엄마, 나 두 표차이로 반장선거 떨어졌어.’같은 거짓말이 사실성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거짓말을 스스로 믿는 것이다. 비록 거짓이더라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어야 진실한 눈동자로 전달할 수 있다. 리나는 어린 나이에 이 모든 스킬을 터득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급식비는 엄마가 놀라 외할아버지에게 SOS를 치지 않을 수준으로 줄여서 엄마에게 알렸고, 단 한 번도 그 돈으로 급식을 신청한 적은 없었다. 매점에서 산 둥그런 크림빵 하나로 점심을 때우고 나머지 돈은 차곡차곡 따로 모았다. 터무니없는 수준의 용돈에 그 돈을 보태 가끔은 싸구려 옷도 사고 좋아하는 음악 CD도 샀다. 엄마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콩나물, 두부 정도의 소비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옷이며 CD는 리나의 용돈이면 살 수 있다 생각했던 걸까.


학원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가끔씩 엄마가 문제집 같은 걸 사야하지 않느냐며 쥐어준 돈은 문제집 속 한 챕터를 겨우 살까말까 한 돈이었다. 그래도 리나는 용돈을 올려달라거나 이 돈으론 부족하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늦은 밤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파스자국이 가득한 퉁퉁한 무릎 위에 비닐에 채운 얼음을 얹어두고 벽에 기대 표정 없는 얼굴로 TV만 응시하는 엄마를 보면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리나야, 대학은 무조건 장학금으로 가야 한대. 대학교 학비는 엄마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더라. 우리 리나는 공부 잘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야.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한 계단씩 밟아 내려오듯 차근차근 떨어진 성적의 실상을 모르는 엄마는 헛된 얘기만 반복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 공부를 잘하려면 어떤 게 뒷받침되어야 하는지. 리나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그건 힘들다는 것도. 아무것도 모른다. 


리나는 수능 날 1교시 언어영역만 보고 도망쳐 나왔다. 빼곡한 글자에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어차피 엄마에겐 적당한 수준의 대학교를 대며 장학금을 받기로 했다고 거짓말하면 된다. 그 동안 돈을 벌자. 돈을 벌고 몇 년 뒤 번듯한 직장으로 옮기면 아무 문제없다. 수능시험장 교문 옆 화단에 잔뜩 토하고 나서 놀란 눈의 학부모들을 헤치고 비틀비틀 걸으며 리나는 그런 계획을 세웠다. 


대범하고 엉성한 거짓말이었다. 리나는 대책 없이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의 언론정보학과에 붙었다고 했다. 엄마는 읽기 힘든 눈으로 ‘역시 우리 딸’로 시작하는, 어릴 때 혼자 춘천 갔을 때부터 알아봤다는 예의 그 전설을 허공에 뿌리며 리나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수능성적표도 합격통지서도 없었지만 엄마는 그걸로 그만이었다. 


식당을 나가는 날은 더 줄어들었다. 엄마의 무릎은 구부려 앉기 힘들만큼 거대해졌다. 그 안에 무엇이 불어나고 있는지 병원에 가서 확인해보자는 말은 엄마의 입에서도 리나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리나는 닥치는 대로 눈앞의 돈을 벌었다. 처음에는 주먹구구식이었다. 웨딩홀 서빙, 행사 진행요원, 의류회사 피팅, 상품 포장 등 시급이 웬만큼 세다고 알려진 일은 다 해 봤다. 웬만한 대학생보다 더 바빴다. 이제는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 생계가 달렸다는 생각에 쉴 틈이 없었다. 엄마에겐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고 있어 괜찮고 나머지 시간에는 알바를 할 테니 쉬엄쉬엄 몸 건강이나 챙기시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거짓말대로였다면 대학 졸업반이 되어 취업준비를 해야 할 무렵, 의외로 사회에는 엄마 같은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됐다. 웨딩홀 서빙 1년 경력을 웨딩전문컨설팅 업체 컨설턴트 3년 근무로, 행사 진행요원 5번 경력을 공연기획사 홍보팀 2년 경력으로 바꾸어 내밀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타고난 눈치와 일머리가 좋았던 리나는 또래보다 늘 앞설 수밖에 없었다. 검열이 철저한 대기업 같은 곳에 발을 들이지 않은 덕도 있었지만 어깨너머로 하나를 보면 머리로 열을 정리하고 손으로 능숙하게 스물을 해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서른 살이 되기 전 돈에 대한 절박함이 자신과 비슷했던 또래를 만나 허울 좋은 컨설팅회사를 차렸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수입은 아니었지만 이름난 몇 곳과의 거래를 토대로 강연을 할 기회가 생겼고, 또 그걸 계기 삼아 수십 명의 강사를 거느린 강연 전문 회사를 차릴 수 있었다. 


사람들은 참 쉽게 속았다. 리나가 고급스러운 원단의 수트를 차려입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강연을 하면 그녀가 대학에 간 적도 없고, 잡다한 아르바이트 경력 외엔 내세울 것이 없고, 거짓으로 회사를 세워 요령있게 남을 등쳐먹으며 돈을 벌었다는 걸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스스로 굳이 부정하지 않은 그녀에 대한 추측들이 모여 리나는 어느새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어린 나이에 컨설팅회사를 설립하고 셀 수없는 성공신화를 써내려간 훌륭한 여성 CEO였다. 여성 잡지에도 몇 번이나 그렇게 실렸다. 당당한 포즈의 그녀는 큼지막하게 써진 이름만큼이나 빛났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는 전혀 일을 하지 않았다. 오른쪽 무릎은 시술 한 번, 왼쪽 무릎은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다. 리나는 엄마에게 작은 사이즈의 아파트 하나를 전세로 구해주었다. 일 주일에 두 번은 가사도우미가 가서 집안일을 대신 해주고 간단한 반찬 정도를 만들어주었다. 스마트폰을 쓰지 않는 엄마는 리나에게 자주 전화했다. 자주 좀 들러라. 아줌마가 만들어둔 반찬이 영 입맛에 안 맞는다. 지난번엔 냉장고에 양파가 곰팡이가 슬었던데 치우지도 않고 갔더라. 다리가 아프니 지하철 타기가 영 눈치 보여서 택시밖에 탈 수가 없다. 용돈은 택시비 감안해서 줬으면 좋겠다. 싫은 내색 없는 ‘네’하는 대답과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자잘한 하소연은 컵 안에 갇힌 벌레처럼 빙빙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그녀가 지금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도 중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 정도가 아니었을까. 리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집요하게 과거 행적을 캤던 것 같다. 그녀의 강연이 담긴 개인방송 영상에 조작되고 부풀려진 경력을 폭로하는 댓글이 달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대부분 사실을 말하고 있었지만 일부는 모르는 얘기였다. 다른 댓글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길었던 그 댓글은 묻히는 듯 하다가 다른 여러 개의 커뮤니티로 옮겨지며 리나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졌다.


그녀의 회사는 궁지에 몰렸다. 대표가 주는 신뢰감과 능력이 대부분을 차지했던지라 이 일이 적잖이 이슈가 되고부터는 강연 의뢰가 뚝 끊겨버렸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거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거나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검증을 원하는 곳이 많았다. 리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껍데기를 살아내느라 디딘 곳이 어디인지도 몰랐던 그녀는 강제로 벗겨져 맨발로 땅을 간신히 밟은 느낌이었다. 거품뿐이었던 회사는 빠르게 정리됐다.


엄마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더불어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리나는 가사도우미 파견 업체에 5년분의 비용을 선 지불했다. 엄마의 용돈도 자동이체로 5년간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을 통장에 남겨두었다. 그 외에 뭘 더 할 수 있을까. 리나는 가만히 계산해 보았다. 엄마를 위해 틀어진 인생을 살아온 게 삼십여 년이었다. 앞으로의 5년을 딸로서의 마지막 예의라 쳐도 괜찮은 걸까. 이제 엄마의 딸 리나가 아닌 그냥 리나로 살아도 되는 걸까.


어차피 생각은 말끔하게 정리할 수 없었다. 리나는 도망치듯 공항가는 열차에 탔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저 더운 나라에 가고 싶다는 생각 하나였다. 아플 정도로 따가운 햇살 아래에 있으면 아무것도 감출 수 없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날카로운 해가 스며들고 동그란 어깨를 그을리고 손가락 사이로 뜨겁고 눅눅한 바람을 지나 보내고 데일 것 같은 모래를 맨발로 밟고 서면, 그러면 나는 오로지 나일 수 있겠지.


아침 햇살은 어느새 저편으로 비켜났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의 창문에 조약돌만한 흰 눈송이가 달라붙듯 스친다. 셀 수 있을 정도이던 눈송이는 금세 불어나 창문에 커다랗게 흰 얼룩을 만들어낸다. 리나는 손가락으로 가만히 얼룩진 차창을 쓸었다. 춘천으로 가던 어린 날처럼 마음도 일렁이고 얼룩졌다.


웅-하는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항공입니다.
 2020년 02월 6일 ICN(인천) → DPS(덴파사르) KE630편 출발시간이 변경되어 안내드립니다.
 
 -예약번호 : 0273-0940(SJILED)
 -변경사유 : 기상악화
 -변경내용 : 02월 6일 08:30 → 02월 6일 15:30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창밖은 온통 새하얗다. 리나는 하얗던 그 날 기차에 오르기 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방안에 엄마는 굴러다니는 술병처럼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있었다. 엄마는 목을 긁는듯한 쉰 소리로 구석에 웅크린 리나에게 밤새 소리를 질렀다. 


너만 없었으면! 너만 없었으면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진 않았어! 어쩌다 너 같은 걸 낳아서! 


리나는 단 한번도 그 순간을 잊은 적 없었다. 엄마로부터 춘천까지 도망가야 했던 끔찍한 겨울날.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앙상한 검은 발목의 외할아버지. 엄마 대신 미안하다 미안하다 수없이 반복하며 끌어안았던 마른 장작같던 손길. 겨울이 계속 돌아오는 한 지울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우리 엄마’라는 글씨가 떴다. 열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리나는 받을 수 없는 전화를 손에 쥐고 하얀 밖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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