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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부꾸미 Jan 25. 2021

휴먼 에러

HUMAN ERROR





그 단어를 처음 들은 순간을 경민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햇빛은 분명 쨍쨍한데 눈치 없는 소나기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한 날. 빌빌 돌아가는 선풍기 옆에서 계절에 영 어울리지 않는 수제비를 점심으로 먹느라 등짝이 다 젖은 날. 밥 먹고 돌아오는 길에 진작 단종된 줄 알았던 아이스바를 생전 기웃거린 적 없는 회사 근처 슈퍼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돌고래 소리를 내며 샀던 날.


“휴먼 에러 인정 하시는 거죠?”


한 손엔 아직 다 먹지 못한 아이스바를 쥔 채로 경민은 귀에 담기는 생경한 단어에 눈이 동그래졌다.


“...네?”

“그러니까 휴먼 에러인 부분, 인정 하시는 거 맞냐구요.”


휴먼 에러? 직장 생활 9년 차에 처음 듣는 단어다. 인간이 오작동이라도 했다는 건가. 아니, 로봇처럼 일하는 내가 오작동을 일으켰다는 건가. 경민은 미간을 한껏 올려 주름을 만들며 왼쪽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과장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제 실수를 인정하는 거냐는 의미라면, 네. 맞습니다. 제 실수로 일어난 일이에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면 휴먼 에러 인정하시는 것 맞네요. 알겠습니다. 팀장님 좀 바꿔주세요.”


그는 몇 번이나 유독 똑 부러지는 말투로 ‘휴먼 에러’라는 단어를 불필요할 정도로 반복해 말했다. 마치 이 단어를 사용할 일이 생기기만을 벼르고 별렀던 것처럼. 대학 시절 미국에서 오래 살다 와 한국말이 어눌했던 한 선배가 어디선가 ‘외골수’라는 단어를 주워듣고 와서는 몇 날 며칠 동안 누군가를 묘사할 때마다 “그 쉐끼 완젼 외골수야.” 밑도 끝도 없이 내뱉던 게 생각났다. 묘하게 기분 나쁜 ‘알겠습니다.’는 또 뭔지. ‘알’ 부분만 늘어지듯 말했을 뿐인데 확실한 갑의 마인드가 느껴진다. 맞은편 책상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먹을 꼭 쥐고 있던 팀장에게로 전화를 돌린 뒤 인터넷 창에 ‘휴먼 에러’라고 검색했다. 녹아 흐르기 직전의 남은 아이스바는 한 입에 넣었다. 맙소사, 실제 쓰는 단어가 맞긴 맞았다. 


인적오류(Human Error)

어떤 기계, 시스템 등에 의해 기대되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부적절하게 반응하여 효율성, 안전성, 성과 등을 감소시키는 인간의 결정이나 행동






상황은 이러했다. 홍명철 과장은 경민이 속한 작디작은 회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가장 큰 거래처 H건설사의 업무지원팀에 있다. 말 그대로 업무에 필요한 오만가지 일을 지원하는데, 비품을 주문하는 일부터 자사 직원들의 명함을 제작하는 일을 의뢰하는 일까지 홍 과장의 일은 이루 셀 수 없다. 경민의 회사는 H건설사에서 의뢰하는 인쇄 제작물의 대부분을 도맡아 디자인하고 만들어낸다. 일 년에 한 번씩 제작되는 자사 홍보 브로슈어 제작 건은 그중에서도 꽤 돈이 되는 일이다. 골프며 당구며, 회사일보다 공과 더 친한 경민네 사장은 요맘때면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회사를 자주 얼굴을 비추고 괜스레 유난을 떨며 제작 상황을 체크하곤 했다.


엄밀히 따지자면 경민의 실수가 맞았다. 그들이 새로 건설한 금융회사 건물 소개 페이지에 층 면적을 잘못 적어 넣었다. 천 평 가까이 되는 한 층의 면적은 경민이 맨 뒤 자릿수를 하나 빠트리는 바람에 고작 넉넉한 빌라 면적 정도가 되었다. 일정보다 빨리 제작된 3,000부의 브로슈어를 뿌듯한 마음으로 살펴보다 가장 먼저 오류를 발견한 심약한 팀장은 그 날 하루 동안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끙끙 앓다 배탈이 났다.


다음 날 얼굴이 반쪽이 된 팀장이 더듬더듬 경민에게 상황을 전달했고, 순간적으로 온 몸의 근육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던 경민은 이내 정신을 차려 자기가 직접 홍명철 과장과 통화하겠다며 팀장을 조금 안심시켰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전부 재제작을 해달라고 하면 어쩌나, 스티커로 오탈자 부분만 수정하는 것을 권유해도 씨알도 안 먹히면 어쩌나, 내 월급 안에서 해결이 되는 부분인가 계산하기 바빴다.


두루뭉술 따지자면 경민만의 실수는 아니었다. 팀장이 경민을 크게 나무라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직원이라 봐야 열 손가락을 다 접어 셀 필요도 없는 이 코딱지만 한 회사에서 디자인팀은 팀장, 경민 단 둘이었다. 말이 팀이지 디자인 작업은 경민이 모두 했다. 컨셉 회의 같은 건 해본 적도 없고 일이 들어오면 경민이 알아서 뚝딱뚝딱 디자인을 서너 개 뽑아내 팀장에게 보여주고, ‘이건 좀 아니지 않아?’ 말이 나오는 부분만 수정해서 거래처에 보냈다. 그러니까 팀장의 역할은, 종일 무기력하게 앉아 있다가 경민이 작업한 시안을 보고 ‘Go’ 또는 ‘Stop‘을 외치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제작하기 직전 최종 파일은 항상 팀장이 마지막으로 검토하므로 경민에게만 책임을 물 수 없게 됐다.


경민이 이 어설픈 회사를 그만두지 않는 데에도 또 그 이유가 있었다. 혼자서 모든 디자인을 컨셉부터 최종까지 도맡아야 한다는 부담감만 생각하면 몇 번이나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잠적해버리고 싶지만, 정작 일이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늘 칼 퇴근. 심지어 금요일에는 다섯 시면 들썩거리는 팀장 덕에 얼레벌레 퇴근할 수 있었고, 야근을 해본 건 이 회사에 있었던 4년 동안 단 두 번 이었다. 하루 종일 일이 없어 주구장창 영화만 보며 시간을 때우다 퇴근하는 일도 종종 있다. 몇 개의 안정적인 거래처 덕에 소박한 월급은 한 번도 밀린 적 없이 따박 따박 통장을 채웠다. 그 소박함에 울컥해 때려치우자 맘먹을 때마다 동종 업계의 친구들이 워라밸의 소중함을 모르는 넌 배가 불렀다며 경민을 돌아 세우는 것이다. 밸런스를 논하기엔 지표 자체가 너무 낮은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4년 전 입사 때에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선택했던 걸 떠올리면 경민은 앞뒤가 맞지 않는 자신의 알량한 마음이 한심해지곤 했다.


내년에 결혼하면 더 미룰 것도 없이 아이도 가져야 하니까. 아이를 가지면 널널한 지금 같은 직장이 아쉬울 테니까. 들어오는 돈은 적어도 어영부영 버티기만 하면 경력 단절 걱정은 없으니까. 더 올라갈 자리는 없어도 긴 세월 버티면 다른 회사에서는 관리자 급으로 대우해줄지도 모르니까. 그만두지 못할 이유를 나열하는 게 노래 가사처럼 익숙해졌다. 경민은 이따금 찾아오는 마음의 동요를 스스로 잠재우며 진정한 사회인의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네네. 아휴, 그런 말씀 마세요. 최대한 빨리 제작해서 수정까지 다 마친 후에 납기 일자 맞춰서 제가 직접 가지고 방문하겠습니다. 네네, 감사합니다, 과장님.”


팀장은 울상인 표정과 매치가 되지 않는 밝고 높은 톤으로 통화를 마치곤, 기가 빠진 듯 풀썩 엎드렸다.


홍명철 과장은 스티커로 부분 수정하자는 제안을 수락했다. 스티커 제작은 얼마 되지 않으니 경민의 귀여운 월급에도 큰 지장은 없을 터였다. 서둘러 수정된 문구를 새로운 파일로 만들었다. 


“팀장니임. 괜찮으세요? 스티커 제작비용은 제 선에서 해결할게요. 꼼꼼하게 못 봐서 죄송해요. 아니, 근데 지네도 제작 전에 최종 파일 전달 받아서 다 확인하고 컨펌 완료했으면서 무조건 저희 잘못이라고 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요? 물론 애초에 기입을 잘못한 건 저이긴 해도요. 이게 을의 서러움이라는 거예요?”

“그거 감안해서 재제작 안 하고 스티커 정도로 끝내겠다는 거야아......”


비적비적 고개를 든 팀장의 얼굴은 그 사이 10년은 늙어 있다. 겸연쩍어진 경민은 입을 닫아버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이다. 긴 회사 생활 동안 비하면 사고 친 적은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대형 사고는 아니었다. 물론 최근에 이런 자잘한 사고가 몰려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느슨한 회사 생활 탓인지, 열정에 불을 지피기엔 턱없이 부족한 월급 탓인지, 삼십 대 중반의 권태감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스티커는 내일이면 제작이 완료될 것이고 맘먹고 붙이면 납기 기한에 무리 없이 맞출 수 있다. 하지만 3,000부... 생각만으로도 승모근 위쪽이 돌덩이처럼 굳어가는 것 같았다. 기분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본격적으로 자신을 나무라지도 못하는 팀장 앞에서 보란 듯 한숨을 내쉴 순 없어 속으로 꿀꺽 삼켰다. 더위에 땀을 소나기처럼 흘리며 먹었던 수제비도 한입에 털어 넣은 아이스바도 내려가지 못하고 가슴 언저리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문득 모니터 하단의 개인메신저 창이 깜빡였다. 메시지 창을 연 경민은 못 읽는 외국어를 본 것 같이 생경해졌다.


어이, 내 첫사랑. 잘 지내?


친구로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였다. 누군가 번호를 잘못 알고 저장해 보낸 메시지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았다. 커다란 강을 앞에 두고 쪼그려 앉은 남자와 엉거주춤 선 조그만 아이의 뒷모습이다. 둘의 낚싯대가 회색 강을 향해 길게 드리워져 있다. 두 사람의 머리색이 유난히 밝은 갈색으로 빛났다. 그 순간 경민은 아! 하고 케케묵은 기억을 떠올렸다. 나를 첫사랑이라고 부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지.






준호는 오후가 되도록 경민에게 한 마디도 걸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참나, 진짜 마음이 상한 게 누군데. 정말 울어버리고 싶은 게 누군데. 담임 선생님은 야무진 반장이던 경민이 꽤 먼 동네로 전학 간다는 사실을 그 날 아침 밋밋한 목소리로 3분단 둘째 줄이 방과 후 청소라는 전달사항과 함께 알렸다.


짝꿍인 준호는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너 전학 가?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럼? 두 마디를 끝으로 경민 쪽을 아예 바라보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경민 주위를 에워싸고 아쉬움을 토로하며 소소한 이별이 주는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한껏 만들고 있는데도 그랬다. 되레 경민이 서운해질 지경이었다.


준호는 싸움꾼이었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외국인처럼 낯선 밝은 갈색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그 아이는 곱상한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다수를 상대로 치고 박고 다녔다. 어른들은 그 아이의 아버지가 폭력으로 수감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둥, 집에 어린 삼남매만 남겨두고 엄마도 하루 종일 술 팔아 돈 번답시고 밖으로만 나돌기 때문이라는 둥 꼬마 싸움꾼의 서사를 완성시키곤 했다. 교실 뒤에서 악을 지르며 말뚝 박기나 하고 천진하게 놀던 남자애들도 준호가 나타나면 우두머리 사자라도 나타난 듯 목소리가 줄어들고 움직임도 작아졌다.


“경민아, 준호가 너 좋아한다는데, 그거 진짜야?”

가장 친한 예슬이가 어느 날 학교 최대의 가십거리를 가지고 경민 앞에 섰다. 모르는 사이 준호는 어느 날 부터 경민을 좋아한다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닌 모양이었다. 참 모를 일이었다. 어른들도 손 뗀 어린 싸움꾼이 어른들의 눈에 들기 위한 짓만 골라하는 모범생을 좋아하다니. 예슬도 소문을 듣고 의아했을 것이다.


“응? 진짜야?”

재차 묻는 예슬 너머로 답을 듣기 원하는 다른 아이들의 천진한 눈동자가 모여들었다. 뭐, 경민도 아는 바가 없어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달싹이는데 뒤 쪽으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대신 대답했다.

“그걸 왜 걔한테 물어봐? 나한테 물어봐야지. 진짜야.”

이게 무슨 청춘 로맨스물 같은 분위기인지. 경민은 해진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게 선 준호를 바라봤다. 여린 갈색 머리가 초여름 바람에 이마 위에서 제멋대로 나부꼈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준호는 누군가를 흠씬 두들기고 다녔고, 경민은 말썽피운 아이 이름을 칠판에 적었다. 하지만 가끔씩 준호를 바라볼 때면 얽히고 싶지 않은 문제아로만 보일 뿐이던 그 애에게서 뭐라도 낀 것 마냥 예쁜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누구와 섞여있어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예뻤고, 선생님한테 혼날 때 열중쉬어 자세로 고개를 살짝 숙인 옆모습이 예뻤다. 손 여기저기 긁히거나 까진 상처위에 올라앉은 작은 딱지들이 예뻤고, 늘 심각한 어른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있다가 가끔 경민의 말에만 무방비로 보여주는 미소가 예뻤다. 뭐가 그리 더운 건지 쉬는 시간마다 수돗가에서 머리까지 다 적시고 오는 일이 잦았던 준호는 옆을 지날 때마다 풋풋한 물비린내가 났다. 그것마저 예쁘다고 느낄 때쯤 알았다. 준호를 좋아한다는 걸.


재개발이 될 ‘지’도 모르는 낡은 아파트에 이사를 갈 예정이고, 그래서 그 근처 학교로 전학가야 한다는 말을 엄마에게 듣고 부터는 초조해졌다. 경민은 준호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둘 사이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이사 날짜는 한 달 앞으로 다가왔는데 경민은 마음에 꽉 들어찬 준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두하느라 친구들에게도 전학 얘기는 할 생각조차 못했다.


선생님께 부탁해 전학가기 전 짝꿍을 한 번 해보는 것으로 결단을 내렸다. 한 달 만이라도 가깝게 지내자. 예쁜 점들을 가까이서 보고 마음을 전하자. 경민은 매일 검사 받는 일기장에 조심스럽게 ‘준호와 꼭 짝꿍이 되게 해주세요, 선생님.’ 꾹꾹 연필로 눌러 적고 떨리는 마음으로 며칠을 더 기다렸다.


금요일 하교 전, 경민과 준호는 나란히 2분단 맨 끝에 앉게 되었다. 책가방을 꼭 끌어안고 옮겨온 자리에 앉은 둘은 괜스레 멀찍이 떨어진 채 딴 곳을 보고 멋쩍게 웃기만 했다. 바뀐 자리를 찾아가느라 분주한 아이들을 인내심 있게 바라보는 선생님의 표정은 어딘가 무미건조해서, 일기장에 간절히 쓴 부탁이 통한건지 우연히 이렇게 앉게 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월요일부터 둘은 차근차근 가까워졌다. 준호는 틈날 때마다 누군가를 붙들고 두드려 패던 것을 그만두었다.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창밖만 내다보던 수업시간에 이제는 책도 좀 들여다보고, 경민 책을 넘겨다보며 똑같이 뭔가를 끼적이기도 했다. 건전지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달달달 떨던 다리도 “내 쪽까지 책상이 흔들리잖아” 하는 경민의 말 한마디에 멈췄다. 경민도 더 이상 칠판에 준호의 이름을 적지 않았다. 대신 수업시간 공책 귀퉁이에 하고 싶은 말들, 물어보고 싶은 것들을 적어 조용히 준호 쪽으로 밀었다. 글씨가 엉망진창인 준호는 대답을 글로 쓰지 않고 소근소근 말로 하려다 특유의 허스키한 쇳소리가 나와 선생님에게 자주 걸렸다. 떠들지 말라고 주의를 받아도 준호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죽여 웃기만 했다.


달력에 엑스 표시는 늘어 가는데 아직도 경민은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나 너 좋아해.’라고 말하면 그 다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으니 영화 속 어른들처럼 키스라도 하나? 아니면 연필이라도 부러뜨려 한 쪽씩 나눠 가지고 미래를 약속해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참 좋은 추억이었어, 바이바이.’?? 그렇게 일생일대의 고민으로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전학 날짜까지는 3일이 남았다.


그 날도 변함없이 둘은 사이가 좋았고, 한여름치고는 바람이 텁텁하지 않았으며, 교실을 떠도는 공기에서는 선풍기 먼지가 섞인 어딘가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방과 후 아이들이 책가방을 싸는 어수선한 틈에 아주 잠깐 경민의 볼을 촉촉하고 따뜻한 준호의 입술이 누르고 갔다. 가방에 필통을 넣던 경민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한 발 늦게 깨닫자 고개를 들 수 없어 가방 지퍼도 못 잠그고 대강 어깨에 둘러멘 채 로봇 같은 걸음으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그 바람에 준호의 표정이 어땠는지, 다른 아이들이 그 장면을 봤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집에 와서도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몇 번이고 그 순간을 생각했다. 정작 느낀 건 따뜻한 입술뿐이었지만 준호의 시선에서도 떠올리고, 제 3자의 시선으로도 떠올렸다. 닿은 위치를 그리라면 정확히 그릴 수 있을 만큼 생생했다. 12년 인생에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이 또 있을까.


경민은 똑같은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할 자신은 없었다. 좋아한다는 마음 소중한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 어른의 방법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것 밖에 없다는 게 속상했다. 나머지 시간동안 그런 고민을 하다가 그렇게 전학 당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책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의자에 깊게 기대앉은 준호는 경민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온 몸으로 서운한 기색을 뿜어내는 준호를 달래기에는 경민의 마음도 너무 닳아져버렸다. 결국 수업이 모두 끝날 때까지 둘은 말을 섞지 못했다. 선생님은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라는 말을 종례시간에 전했다.


경민에게 작별인사를 전한 아이들이 대부분 교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둘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준호는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앞만 보고 앉은 채였다. 책가방을 메고 옆 자리에 앉아 똑같이 앞만 보던 경민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지막을 맺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간신히 입을 열어 듣기 힘들 정도로 작게 말했다.


“미안해.”


좋아한다는 말 대신 전할 수 있는 마음은 그것뿐이었다.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용기 내어 스치듯 겨우 본 준호는 주머니에서 뺀 상처투성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변했을지 그대로일지 가늠조차 불가능한 시간이 흘렀다. 사진 속 꼬마 아이는 첫째 아들이고, 얼마 전 돌을 지난 아들이 하나 더 있다고 얘기하는 준호의 메시지에서 낯선 쾌활함이 느껴졌다. 그는 경민이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르고 고른 질문들과 단답형 대답에 아랑곳 않고 자신의 개인 정보를 주절주절 떠들었다. 경민이 몇 다리를 건너 들어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중학교를 그만두게 된 얘기와, 다시 마음잡고 고등학교에 가서 유도를 시작하게 된 얘기, 자기 팔자에는 없을 줄 알았던 대학이라는 곳도 운동으로 갈 수 있었던 얘기,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자기 없인 죽겠다는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 얘기까지. 어느 정도의 나이 선을 지난 뒤 알게 된 어떤 사람들을 떠올려 봐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자신에 대해 털어놓는 사람은 없었기에 경민은 지금의 감정이 반가운 신선함인지 불편함인지 혼란스러웠다.


넌? 넌 결혼했어?


준호의 질문이 날아들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할지 ‘아니’라고 대답할지 고민하다 메세지창에 ‘아니’를 적었다. 그는 경민의 답글을 보자마자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럼 우리 오늘 만날까?


경민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그는 결혼을 해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내 쪽이 결혼을 안했으니 ‘그럼’ 오늘 만나자는 건 무슨 의미지? 제약은 오로지 경민의 결혼여부에 있다는 듯한 시원스런 제안에 그녀는 약간의 선을 그었다.


남자친구가 좋아할 것 같진 않은데.


이번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리고 준호가 다시 답했다.


친구만나는 것도 애인한테 허락받아야 되는 거야? 손경민, 그렇게 안 봤는데. 


문득 경민은 준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 사이 비어있는 20년이 넘는 공백 동안 먼 발치에서 언뜻 들은 서로에 대한 소식을 제외하고는 채울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그는 그렇게 안 ‘봤’다는 둥, ‘그럼’ 오늘 만나자는 둥 뭔가가 차 있는 듯이 얘기한다. 그의 빈 시간 속에 내가 어떤 식으로 채워져 있는 건지 확인해봐야겠다고 경민은 생각했다. 


조금의 기대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첫사랑이라고 불리는 일은 흔하지 않으니까. 어린 시절의 마음과 열정 같은 건 어떤 형태로 남아있게 되는지 궁금했다. 미화된 기억을 더듬어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마주하면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었다. 자잘한 상처가 끊이지 않았던 하얀 얼굴은 그대로일까. 미간을 찌푸리는 듯한 표정은 그대로일까. 웃을 땐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버릇은 그대로일까.


퇴근 후에 만나서 저녁이나 먹자는 경민의 대답에 준호는 반색했다. 자신은 외근직이라 일도 일찍 끝나고 이동도 쉬우니 경민이 편한 쪽으로 가겠다고 했다. 구체적인 저녁 메뉴 같은 건 제쳐놓고 대략의 시간과 장소만 정했다. 경민은 일을 빨리 마무리하고 약속한 것보다 먼저 나가있을 생각이었다.


“팀장님, 저 오늘 조금 일찍 나가봐도 될까요?”

경민은 약간 소리를 높여 힘주어 말했다. 팀장은 쓰고 있던 헤드폰을 들추며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티커는 제작 넘겼지? 그래, 가자. 가자아. 나도 갈란다. 앉아 있어 뭐 하냐. 오늘 지친다, 지쳐.”

“네. 내일 제작된 거 오면 제가 밤을 새서라도 싹 붙여 놓을게요. 팀장님은 걱정 마세요.”

팀장은 고개만큼이나 맥없는 손목을 휘휘 흔들며 가라고 내저었다. 








약속 장소는 회사에서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떨어진 번화가로 잡았다. 회사가 있는 동네의 뻔하디 뻔한 식당 몇 개는 점심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 전부인 일상 속 공간이라 그걸 굳이 깨고 싶지 않았다. 사람도 많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만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아무리 좋은 감정의 추억을 공유한다 한들 그동안의 인생을 낱낱이 서로 나눠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할 것 같다던 준호보다 경민은 한 발 더 일찍 왔다. 만날 곳이 바로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밖을 내다보며 앉았다. 사무실을 나오기 전 옅은 향수를 뿌린 덕에 다행히 점심 먹는 동안 축축하게 젖었던 옷에서도 불쾌한 땀 냄새는 나지 않았다. 정말 요상한 날씨였다. 눈치 보듯 재빨리 내리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소나기가 완전히 물러가고 나서는 초가을을 닮은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깥 공기도 쾌적하고 약하게 돌아가는 뽀송한 에어컨 밑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으니 이 지겨운 여름도 흘러가긴 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흘러간다는 건 늘 좋은 일이었다. 일에도 흐름과 그 끝의 마무리가 있었다. 물론 오늘 약간의 삐그덕거리는 사고가 있어 잠시 멈추긴 했지만 해결할 방법이 있었고 또 그렇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마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 눈물이 앞섰던 어린 시절은 흐르고 흘러 전달하기 전 거리까지도 정밀하게 재고 조준하는 어른이 되었다. 뿌듯한 일이다. 준호에게도 그런 시간이 흘렀다면 우리는 정말 멋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경민은 생각했다. 


길 건너편 모퉁이 상가 앞에 작은 차 한대가 멈춰 섰다. 좁은 차도에 방해되지 않게 건물에 최대한 바싹 붙이느라 앞뒤로 몇 번을 왔다갔다하며 주차를 하는 차 겉면은 온통 통신사 로고로 래핑이 되어있다. 손바닥 밀어 넣기도 힘들 정도로 틈 없는 주차를 한 차 주인은 운전석 대신 조수석 쪽으로 내렸다. 회색이 섞인 베이지 색 옷에 주황색과 빨간색 포인트가 들어간 그 통신사 특유의 작업복을 입은 남자는 몰고 온 차에 비해 덩치가 커서 차에서 짐짝처럼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상가에 작업이 있나보다, 시선을 옮기려는데 뒤돌아 서있던 남자가 두 손으로 머리며 옷을 툴툴 털었다. 밝은 갈색의 머리가 마구 헝클어졌다.


경민은 손등으로 입 쪽을 가렸다. 준호가 맞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의 피부는 더 이상 푸릇푸릇한 혈관이 보일 정도로 희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듯 힘 준 듯한 표정도 이젠 없다. 기대에 가득 찬 눈은 카페 안 경민이 아닌 훨씬 더 굉장하고 대단한 것을 찾기라도 하는 듯 허공을 맴돌았고, 건조하게 일어난 입술은 약간 벌어져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잔뜩 굽은 어깨와 앞으로 쑥 빠진 목. 그저 바르지 않은 자세로 서있을 뿐인데 왜 그의 그런 모습에서 절박함을 느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절박함이 왜 그리도 하찮아 보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경민의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준호는 여전히 여러 방향으로 몸을 돌려가며 두리번거리고 귀에 핸드폰을 댔다가 떼어내 화면을 보기를 반복했다. 경민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전화를 받는 순간 잊고 있던 20년의 아름다운 공백은 순식간에 볼품없는 이야기들로 메워질 것이다. 빨리 지금이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간절하게 생각했다.


멈췄다 집요하게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꼭 쥐고 경민은 고장나버렸다. 그 어떤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고 부적절하게 반응하여 안전성을 감소시키고 있었다. 휴먼 에러라는 그 듣도 보도 못했던 말은 더 적절하게 쓰일 곳이 분명히 있구나. 경민은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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