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볼품없더라도 재밌게 살아보자는 목표
나는 한참 어릴 때부터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물음을 갖고 살아왔다. 내가 누군가의 고용인이 되고, 배우자, 아이의 엄마라는 보조자의 삶에 진입된 순간부터 나의 역할은 시시때때로 요청에 의해 엄청나게 확장되었다가 꽈리처럼 쭈그러드는 것이 반복됐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내 삶의 의미는 주도성을 잃고 보조자의 일을 잘 수행하는 것으로 좁혀졌다. 온힘을 다해 눈앞의 할 일을 쳐내고 나면 이전처럼 자유롭게 온 방향으로 유영하는, 주도성을 되찾은 내가 남을 줄 알았다. 그렇지만 보조자로서의 내 몫을 완수하고 나면 모든 것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물결에 내 존재의 의미도 함께 쓸려 내려간다. 해변가 모래위에 나의 이름을 깊이 새겨 넣었다가도 한 번의 물결에 흔적도 없이 이름이 지워지는 것처럼 허무했다. 그래서 무료한 시간마다 종종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다. 왜 사는지.
아마도 내가 우울증을 앓았던 기간이 얕든 깊든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과 슬픔의 전 기간에 걸쳐 끊임없이 나에게 던져지는 저 질문은 순간의 기분에 휩쓸린 허무주의와는 조금 다르다. 가끔 왜 사는지에 대해 배우자나 주변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나의 배우자는 천년만년 장수를 하고 싶은 1인으로서 나의 감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 몇 명도 오랫동안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오랫동안 재밌고 싶다는 건 지금 사는 것이 재밌다는 의미인건지. 정말 그렇다면 비법을 묻고 싶었다. 부자가 되는 방법보다 재밌는 삶을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그 방법이 있기나 할까?
왜 사는가, 라는 질문에 친한 지인 중 소수의 몇 명은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며 ‘태어났으니 사는 것 같다’ 고 했다. 처음에는 그 소수의 의견과 내가 같은 의견을 갖는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그건 좀 억울했다. 태어났으니 산거라고 가볍게 치부하기엔 너무 쉴 새 없이 열심을 다해 살았다. 또 너무도 성실하게 살아왔다. 답을 찾지 못한 채 한동안 답답한 채로 억울함을 주억거렸다. 삼십년 넘게 목적 없이 성실해놓곤 이제 와서 의미를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며 이 질문 자체에 회의적이기도 했다. 빈 벽에 테니스공을 계속 던지는 것처럼 무료해지는 문득의 순간마다 질문을 골똘히 되풀이했다. 그러던 중 내내 나를 두드리던 ‘왜 사는지’ 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선, 계속 질문을 이어갈 수 있는 답변들이 먼저 존재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뒤집어봤다. 살기위해 나는 매일같이 무엇을 하는가. 잘 살기위해 어떤 것들을 시도하는가. 내 기준에 잘 사는 것은 무엇인가.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살기위해 간신히 일상만 꾸려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단골 커피숍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셨다. 무심히 흘러넘친 커피잔을 응시하다가 밑에 깔린 종이에 인쇄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Passion/ a strong barely controllable emotion.
moved or to be moved by love.
passion is no ordinary word”
내가 뭔가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강렬함의 감정이 열정이었구나. 저 문구가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쉽게 나가지 않고 계속 맴돌았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장악하여 물 흐르듯 만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오히려 상실하게 된 감정. 생생히 살아있다는 느낌. 살아있는 건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것인데 자꾸만 정돈하려고 하고 당장이라도 매듭지어야 할 것처럼 이변의 가능성들을 제한하다 보니 내 삶을 탱글거리게 해주는 재미난 변수들은 빠르게 소멸해갔다. 삶의 다양한 구멍에서 생명수가 펌프질하듯 쏟아 내리던 어린 시절엔 열정을 굳이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다. 온통 새로운 자극과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이 가득해서 버거울 지경이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삶에서 터져 나오는 봇물구멍을 하나하나 막아가는 것이 목표였다면 지금은 반대로 삶이 여러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구멍을 뚫는 것이 열정이 되어버렸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가 강렬하게 나타날 것만 같다.
사실 왜 사는지, 왜 삶을 더 이어가야하는지 답하지 못했던 건 사실 현재의 삶이 나쁘지 않다는 의미였다. 더 나아져야겠다는 의지나 필요도 없고, 이 정도면 살면서 경험해볼 좋은 것들 많이 누렸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삶이 꼭 ‘나아지려고’ 사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었다.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not ordinary한 가능성들을 충분히 누리고 즐겨보는 것도 삶일 수 있다.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에 미친 듯이 빠져보기도 하고, 반대로 너무 몰두했던 것이 있다면 슬쩍 놓아보기도 하고. 그 시도들이 특별해야만 하고, 완벽한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는 것이 진짜 열정 있는 삶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원숭이 칼집 게임처럼 손끝에 약간의 두려움을 얹은 채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대하며 통나무에 칼집을 푹 하고 찔러 넣을 수 있는 마음을 펌프질 해보려한다. 눈을 질끈 감는 순간들이 더 많아지길 바라며. 어떤 삶을 살지 너무 대단하게 걱정하기보다는 오늘은 어떤 커피를 마실까 일부러 설레어하고, 무슨 멍청한 행동으로 재미를 한 스푼 더할지 장난꾸러기처럼 매순간 키득대는 날들이 풍성해지길 바라며.
삶에 열심히 구멍을 뚫자.
친구의 똥침 하나에도 킬킬대던 그 시절처럼 서슴없이 찔러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