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인형이 빚어가는 희망과 행복, 그리고 사랑의 시간들
나는 소위 말하는 걱정인형이다. 더없이 평온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서 잘 흘러가는 순간에도 걱정을 붙들고 산다. 행복한 기운이 느껴지면 내가 지금 무언가를 놓치고 이렇게 희희낙락 맘 편하게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부터 한다. 어디 나사 하나가 분명 빠져있을 거라는 강한 부정의 생각에 골몰하여 행복의 순간을 그 자체로 즐기지 못한다. 좀 더 나아가 행복의 순간을 겨우 인정하고 나면 곧장 이 달콤한 모래성이 언제 무너질까 불안해하는 전전긍긍의 스위치가 켜진다. 과거와 현재의 불안감에 휩싸여서 미래를 그리워해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특별히 욕심이랄 것도 없는 삶인데 왜 현재의 땅을 밟고 서는 게 이렇게 벼랑 같은 마음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광활한 우주를 정처 없이 떠도는 우주인처럼 흙바닥에 발자국을 쿵 하고 찍기조차 어려웠던 시간들. 유년시절의 나, 학창시절의 나, 사회초년생으로의 나, 엄마로서의 나, 아내로서의 나, 어른으로서의 나를 하나의 인간으로 겹쳐서 무던하게 살아낼 수 없었던 날들. 조각난 나의 자아들을 놓아버리지도 날려버리지도 못하고 양손 가득 쥔 채 질질 끌고 왔던 고된 시간들. 아마도 내가 거쳐 온 나의 현재들을 온전히 충분하다고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세월을 통해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는데 그다지 나아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그럴듯하고 완벽한 모습의 나를 상상했던 걸까. 휘번쩍 거리지 않는 잔잔한 현재들을 부정하다 보니 나는 내 미래가 기대 되지 않는 지경까지 이르렀었다. 그냥 사니까 사는 거지. 어짜피 죽어서 썪어버릴텐데 뭐 그렇게 대단하게 살겠다고. 어린 시절의 나는 늘 앞을 바라보고 축복된 미래를 상상했었는데 어느 순간 내 마음은 이미 관속에 들어간 것처럼 눅눅해졌다. 발랄했던 마음의 빛은 관속에 묻혀서 광채를 잃고 병들어갔다. 현재를 부정하니 자연히 미래에 대한 상상과 희망도 없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부끄럽게도 더욱 비관적인 회의주의자가 되어갔다. 어떻게 한 인간을 키워내야 할지 답도 없고 체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계속 미래로 나아가라는 무언의 압박들이 버거웠다. 혼자였다면 가만히 침잠해서 웅크리고 있었을 텐데 아이가 성장하면서 나는 보호자로써 발에 채이듯 앞으로 밀려나갔다. 의지가 있어서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마치 아이 탓을 하듯 내 자아를 더 구겨 넣고 살았다. 홍콩에 오면서 휴직을 하게 되고 덜컥 아이의 주양육자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비껴나 있을 공간 없이 하루 종일 아이의 감정과 나의 감정을 반사판처럼 마주하고 지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런데 아이는 내 생각보다 꽤 많이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말을 참 잘 하게 되었다. 아이의 말은 대체로 따뜻했다.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이야기를 해줄 때가 많았다. 아빠 구두가 낡은 것 같으니 생일 선물로 구두를 선물했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처음으로 놀랐다. 나는 남편의 발을 쳐다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는 그걸 열심히 봤던 것이다. 더운 날씨에도 업무상의 이유로 긴팔 양복만 입는 아빠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옷을 사지 못하는 가난한 아빠에게 반팔을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는 모습에 웃음이 크게 터졌다. 아이 양육을 온전히 맡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는데 그것은 나의 기우였다. 내가 걱정과 두려움의 고랑에 빠지지 못하도록 아이는 끊임없이 재잘대며 나에게 ‘앞으로 무언가를 하자’ 고 계속 독려해주었다. 처음엔 앞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이 번거롭고 귀찮았다. 난 가만히 있고 싶은데 왜 아이 때문에 내가 힘들게 몸을 일으켜야 하지 불평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바퀴에 기름칠을 한 것처럼 몸과 마음의 혈액이 새롭게 순환하는 느낌이 번쩍 들었다. 오래 달리지 못했던 차가 끼익하고 제 엔진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처럼.
어느날 저녁 평소처럼 아이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더위 탓인지 유독 잠에 들지 않는 아이가 눈망울을 반짝이며 잠에 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얼른 자라고 했을텐데 그날따라 묻고 싶어졌다. 왜? 아이가 답했다. ‘엄마 하루 종일 재미난 게 얼마나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 밤새 놀고 싶어!’ 뒤이어 내가 조심히 물었다. 내일이 기대 되냐고. 아이는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당연히 기대된다고 하며 무엇 무엇을 정말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수영장가기, 마트에서 지렁이젤리 사먹기, 그리고 아빠랑 셋이 삼겹살 먹기. 너무도 소박한 아이의 희망사항에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뜨거운 숨으로 꽉 채워졌다.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사실 정말 별게 아닌데 무슨 팬시함을 기대하면서 현재를 비관했던 건지 자꾸만 곱씹게 됐다.
아이와 저 대화를 한 이후부터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행복을 정의해보려고 노력했다. 마음이 먹먹해지는 어둠이 드리울라치면 식탁에 앉아 향긋한 차부터 한잔 마신다. 요즘 제일 좋아하는 차는 Positive Energy 라는 탠저린향의 허브차다. 차한잔 커피한잔 번갈아 마시며 지금 좋은 것 하나를 꼽는다. 편안한 위장, 강도 높은 운동후에 오는 기분좋은 근육통, 멍 때리며 다음주 식단을 짜는 여유, 우연히 골랐는데 너무 재미있는 영화트레일러, 아껴보는 나의 해방일지 손석구 쇼트영상, 친한 친구가 보내준 말차스콘 맛집 사진, 오븐에서 풍기는 베이글 굽는 냄새 등등. 나에게 ‘좋다’ 라는 기운을 주는 것들이 생각보다 참 많았다. 그런 것들을 의식적으로 느끼고 기억하려고 하니 행복의 순간들이 편해졌다. 안좋은 일이 있다가도 나에겐 다시 좋은 시간이 올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일이 잘 안 되서 걱정하는 남편에게 ‘새옹지마라는 속담 모르냐’는 농담까지 편하게 던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현실의 걱정이 가득한 가까운 미래보단 먼 미래를 상상하는 연습을 했다. 그랬더니 현재의 걱정이 더 이상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사히 목표하는 미래의 행복한 모습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몸을 무겁게 했던 걱정과 욕심들이 빠져나가고 나의 현재가 몹시 가벼워졌다.
현재가 가벼워지니 운신의 폭이 자유로워졌다. 희망을 품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에 날개를 달려고 노력한다. 어릴 땐 먼 하늘만 바라봐도 온갖 상상과 꿈들이 마음가득 피어올라 창문을 뒤덮을 정도였는데 어른이 된 지금도 그게 가능할까. 여전히 확신에 찬 파워긍정 모드는 아니지만 최소한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늘 하루가 기대된다. 다시 잠들고 싶다가도 무언가 재밌는걸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 딸처럼 내일이 너무 기다려져서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다시 찾아올까 싶긴 하지만 유년기의 상상과 또다른 어른의 상상이 가능할 거라고 믿고싶다.
미래는 내가 빚어가는 것이니까 부서질게 없지.
걱정인형의 탈을 내려놓고 좀 더 가볍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