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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뚜라미 Jan 12. 2024

아빠와 두 번째 의절을 했다

서른여섯 번째 생일에 적어보는 우울한 이야기

얼마 전 만 여섯 살이 된 딸아이를 재우며 종종 생각한다.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라면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 할 텐데.. 왜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그토록 가혹했을까’. 보통은 부모가 되면 본인의 부모님이 이해가 되어 그동안 불효한 것이 후회된다고들 하는데 난 도리어 어린 시절의 내가 너무나도 외로워 보이고 때론 시리다.


자로 잰 듯 딱 떨어지는 매일의 일상을 살아내려 노력했던 아빠는 그 누구보다 가정에 충실했고 몸이 약한 엄마를 대신해 종종 자주 청소, 설거지, 요리까지 하실 정도로 모범적인 가장이었다. 내가 아는 한 바람이나 외도 같은 큰 결격사유도 없었고 삶의 낙이라곤 회사 분들과 삼겹살에 소주 한잔하고 들어오는 게 전부였던, 일평생 교과서 같은 일과를 살아내던 아빠. 외동딸인 나에게도 무척이나 헌신적인 사랑을 주셨다. 지구상 하나뿐인 분신이었던 나를 정말로 사랑했었을 거고, 사랑을 아낌없이 퍼부으며 그 분신이 온전히 예쁘고 바르게 아빠가 상상한 모습 그대로 자라나길 바라셨을 거다. 그렇게 풍족하지 않은 형편에도 아주 어릴 때부터 악기를 가르쳤고, 유학을 꿈꿀 수 있게 해 주셨다. 또 두 분이 착실히 모은 돈으로 그 시절 엄마아빠들이 소박하게 염원하던 내 집 마련의 꿈도 비교적 빠른 나이에 이루셨다. 이 정도면 50, 60년대 생 여느 아버지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아빠는 본인의 완벽함과 정확함에 엄마와 나를 가두려고 했다. 당돌한 아이였던 나는 두 자릿수 나이가 된 어느 날부터 아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아빠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어른이라는 무기로 억누르던 것들이 늘 논리에 맞았던 것도 아니고 이성적으로 옳았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아빠는 같은 어른이던 엄마를 사사건건 무시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분이 싸울 때마다 엄마에게 향하는 비수와 같은 공격에서  ‘너는 참 미련해’라는 비아냥이 빠지질 않는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굉장한 좌절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미련하다는 말. 아빠의 말을 조금이라도 거스른 결정이나 행동을 했을 때마다 어김없이 들어왔던 말. 나는 미련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미련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설령 누군가가 어떤 바보 같은 결정을 한다고 해도 그걸 타인이 깔아뭉개듯이 밟고 수치심을 느끼게 할 자격은 없다고 믿는다. 일상의 모든 일을 처리할 때, 하물며 병원에 가서도 아빠는 의사보다 본인이 더 옳다고 주장했다. 의사가 경험이 별로 없어서 본인보다 병에 대해서 모른다고 어이없어했다. 어쩌면 아빠는 아빠가 믿는 하나님보다 본인이 더 전지전능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같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지나 중학생이 된 나는 더욱 조목조목 아빠가 하달하는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는 늘 모든 것에 정답이 있었다. 식사예절, 손 씻기 예절, 청소시간, 기상시간, TV시청시간부터 내 목소리의 고저까지 아빠가 통제했다. 허스키한 내 목소리가 개그우먼 박경림을 닮아서 듣기 싫다며 큰 소리로 얘기하지 말라고도 했다. 간혹 귀가해서 3분 안에 샤워를 하지 않겠다고 하면 아빠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이 집에서 살 수 없다고 당장 나가라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미성년인 나에게 밥 먹듯이 했던 협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내 집에서 나가, 너 같은 애 따위한테 내 돈 쓰고 싶지 않아. 누가 들으면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식사 후에 바로 양치하지 않고 초콜릿을 먹었을 때도 같은 말을 들었다. 아빠의 통제로 인해 숨 막힌 삶을 살다가 간혹 ‘다른 집은~’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아빠의 분노는 펌프질을 한 것처럼 더 크게 폭발했다. 내 머리채를 잡아 질질 끌고 현관 앞으로 내복바람의 나를 내쳤다. 그렇게 그 집이 좋아 보이면 내 집에서 당장 나가서 그 집에 가서 살아라,라는 냉골 같은 호통을 들으며 나는 한겨울에 문 앞 계단에 앉아 엘리베이터가 열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울고 또 울었다. 아빠는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시작은 사랑의 매였지만 분노조절이 불가한 아빠는 발작버튼이 눌릴 때마다 구둣주걱으로 나의 온몸을 때렸다. 종아리에는 진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하루는 양다리에 밴드를 더덕더덕 붙이고 학교에 가는 나에게 일면식도 없는 동네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집에서 폭력을 당했냐고 묻기도 했다. 수십 년이 지난 일이라 맞고 등교하는 반복된 일상이 나에게는 잔상만 남아있는데 오히려 중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은 기억한다. 매일같이 등교해서 책상에 엎드려 울던 내 모습을. 도망갈 수 있는 학교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었고, 친구들과 맘껏 놀고 큰소리로 떠들 수 있는 학교가 나에게는 안식처와도 같았다.      


내 기억 속에서 아빠에게 본격적으로 두들겨 맞은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정도부터다. 초등학생 때는 아빠가 이성을 잃고 나를 때리고는 밤에 내 머리맡에 와서 울면서 사죄의 기도를 했다. 아빠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므로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엄청난 죄책감을 진짜로 느끼긴 했다고 믿는다. 형제자매부터 절친했던 친구들까지 본인의 엄격한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하나하나 쳐내다가 혼자가 되어버린 지금까지 아빠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으로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미스터리다. 역시나 독실한 우리 엄마는 정말로 순박하고 여린 영혼으로 세상의 모든 악이 평화를 찾기를 기도하는 사람이고 바르게 살아오셨기에 기독교인의 이중성에 대해 논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최소한 아빠는 기독교인이기 이전에 교육자였다. 그래서 나와 엄마에게 직업병처럼 그 엄격함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라고 최대한 합리화를 시켜보려고 해도 그것은 정상을 한참 벗어나있었다. 보통 아이 엄마들이 아기를 출산하고 나서 극심한 탈모에 시달리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채를 수시로 잡혀왔고 바닥에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뽑혀 왔어서 출산 후 탈모가 그다지 특별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냥 늘상 빠져왔던 것처럼, 내 머리숱구멍이 넓어진 만큼 한 움큼씩 매번 빠졌다.  

   

틈만 나면 ‘내 집에서 나가’라든가 ‘내 돈으로 먹고 자면서 그딴 소리 하지 마라’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목표는 무조건 독립이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내가 일하고 벌어서 먹고살겠다는 생활력이 어쩌면 아빠 덕분에 아주 강력하게 뿌리내렸다. 그리고 아무도 외동이라고 나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누구에게도 잘 의지하지 못한 채 여러 고비들을 헤쳐 가며 사는데 익숙해졌다. ‘내 집에서 나가’와 함께 가장 많이 들었던 비아냥은 ‘내가 네 종이냐’라는 말이었다. 나는 단연코 단 한 번도 내 부모님을 나보다 낮은 사람이라거나,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사람으로 치부한 적이 없다. 그냥 늘 눈치 보고 독립을 꿈꾸며 책잡히지 않게 살려고 버둥거리다가 어쩌다 한번 방심하다가 늦잠을 자서 내 방 청소를 안 했을 뿐이다. 유소년 기에 부모님의 노고를 십분 이해해서 청소, 빨래 등의 집안일을 돕는 다던가, 감사의 말을 전하는 훌륭한 자녀들이 분명 있을 거라 믿는다. 그렇지만 내 주변 누구도 그렇게 철든 아이는 흔치 않았다. 대체로 아이답게, 아이 수준에서 말썽 피우고, 밥을 잘 먹지 않아 부모님을 속상케 하고, 공부로 골머리 썩히는 아이들. 내가 부모가 된 지금 생각해도 부모는 내가 세상에 낳은 아이들을 위해 어느 정도 희생하며 살고, 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잘 보듬으며 부족한 부분을 격려해서 키워내는 의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 말 잘 듣고, 모든 것이 바르고, 부모의 어떤 지시에도 군말 없이 따르는 것이 정말 좋은 아이기만 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나의 아빠는 내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늘 전교에서 순위권에 들었고, 결과적으로 SKY에 무난하게 진학한 나는 무수히 전교 1등을 해내었던 학창 시절에도, 대학 입학 때도, 졸업 후 대기업에 입사했을 때도 아빠에게 따뜻한 칭찬의 말 한마디 들은 것이 없다. 여전히 미련하고 ‘제 잘난 줄 아는’ 오만한 딸이었을 뿐이다. 그 오만한 딸은 아득바득 이를 갈며 목표했던 대로 대학입학과 함께 독립을 했다. 나와 함께 아빠에게 늘 치여서 숨죽이며 살아온 엄마를 두고 집을 박차고 나왔다. 일주일 내내 체력에 부칠 정도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에게 엄마는 아빠 몰래 용돈을 부쳐왔다. 학교 앞 오피스텔 월세에 보태라며 돈을 보내오던 엄마는 가끔 자취방 근처 백반집에서 밥을 사주며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고 우셨다. 그러나 겉으로는 멀쩡하게 대학생으로 살아가던 나의 삶은 속으로 깊게 곪아 있었다. 다행히 좋은 선배와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사는 이유로 찾고, 삶의 크고 작은 목표도 생겼다. 바르고 행복한 마인드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보며 멋진 사람이 되는 것을 꿈꿨다. 그러나 연애를 할 때마다 참 나쁜 사람들을 많이 만나왔다. 낮은 자존감과 사랑에 허기진 외로움이 큰 문제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의 가족에 대한 말을 아끼고 그저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아이처럼 행동했다. 그래서 이십 대 중반 이후에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잠시 만났던 연애상대가 너희 부모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우리 아빠는 새아빠라고 순간적으로 거짓말까지 해버렸다. (아마 그분은 아직도 나를 엄청난 가족사를 가진 처연한 아이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짓말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      


그럭저럭 독립 십 오 년 차쯤에 만난 사내 선배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은 아빠와의 고리를 끊어내고 나만의 온전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절실한 도구이자 기회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과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란 것 같은 나의 배우자. 그와 사랑이 넘치고 웃음이 가득한 집을 만드는 게 작고 소중한 목표였다.

결혼을 앞두고 예단함이 들어오기 전날 수많은 세월을 아빠와 나의 냉랭한 관계 속에서 고통받던 엄마는 울면서 아빠와 나에게 제발 화해하고 평범하게 살면 안 되겠냐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날 아빠와 나는 소주 한잔을 함께 하고 어설프게 악수를 하고, 어색한 포옹으로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거의 절연에 가까웠던 인생의 한 장을 뜯어냈다. 이후 아이가 태어나고, 사랑스러운 손녀를 매개로 내가 연기하던 평범한 가정처럼 우리 부부는 때마다 양가 인사를 드리고, 생신을 챙기고, 신년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했다. 친정집에 갈 때마다 여전히 뾰죽한 아빠의 시선과 행동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엄마나 나에게 쏘아대는 말투가 나올 때마다 애써 무시하려 애썼다. 잠시만 참으면 우린 여느 가족들처럼 그냥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으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이따금 내가 좀 더 굽힌 채로 아빠를 대했다면, 좀 더 애살맞고 천진한 딸이었다면, 꺾이지 않는 아빠의 성향을 맞춰줬더라면 우리가 극단으로 치닫진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의 나였다면 좀 더 넉살 좋게 아빠의 날 선 말투를 받아내고 웃으면서 좋게 좋게 지나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간혹 들었다.   

   

그렇게 수년이 나름대로 무탈하게 지났다. 그리고 나도 아빠도 나이 듦에 따라 둥글어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홍콩으로 이주한 지 일 년 만에 딸아이를 데리고 아주 오래간만에 친정에 방문한 지난 연말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폭설을 걱정한 아빠의 어떠한 지시에 내가 그럴 필요 없다는 의견을 내었고, 그 의견은 반발로 받아들여져서 또다시 아빠의 발작버튼이 작동했다. 이제 모든 걸 알아듣는 나의 영민한 딸이 아침식사를 막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에 아빠는 또다시 너는 네 엄마 닮아서 미련하다는 말과 함께 ‘내 집에서 나가, 꺼져버려, 내가 네 종이냐’라는 전매특허 3종 막말을 세트로 쏟아냈다.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으며 대체 나에게 왜 화를 내냐고 반문했고, 엄마는 목소리를 높여 아빠가 나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빠는 ‘네가 집에 오니 역시나 시끄럽고 짜증 난다’ 고 내지르며 이미 울음을 터뜨린 나에게 더욱 심한 말들을 퍼부었다. 우는 나를 보면서 우리 딸은 따라 울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미 분노조절에 실패한 아빠는 손녀 앞에서 보이지 말았어야 할 행동과 말을 내뱉으며 본인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엄마에게 화를 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빠가 없는 틈에 시댁으로 짐을 옮겼다. 엄마는 나와 딸아이를 시댁으로 데려다주며 그저 네 가족의 행복에 힘쓰라고 부탁했다. 이미 가정법원의 문턱을 한번 밟고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간절했다. 이혼이며 졸혼이며 생각한 것은 수십 년 전이지만 이젠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은 아빠가 안타까울 지경이라는 엄마. 그러면서도 아빠 때문에 얻는 화병으로 온갖 이상한 합병증에 시달리는 병약하고 안쓰러운 우리 엄마. 본인이 힘들면서도 이혼하면 내가 시댁에 얼마나 낯부끄럽겠냐는 걱정부터 하는 엄마. 그런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왔다.     

 

엄마와 헤어지며 나는 앞으로는 정상적인 가족의 일원인척 연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엄마도 아무 저항 없이 한국에 오면 엄마만 만나고 가라고, 굳이 집에 올 필요 없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항상 마음이 추웠던 어린 시절의 내 자아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온 듯 가슴이 불타듯 시렸다. 가정폭력과 폭언에도 의연하게 살아냈던 외로웠던 나 자신을 어른인 내가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다. 최소한 지금의 나에게는 나를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해 주는 우리 딸아이가 있어서 외롭지 않으니.      


부모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해서 완벽하지 않음을 이제는 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허둥대고 온갖 고민투성이에 머리를 싸매며 사는 지금의 나는 이제 편해지고 싶다. 완벽한 가족의 일원인척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족으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밝은 아이인척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다. 꼭 모든 관계를 회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내 부모와의 관계도 예외일 필요는 없다. 내가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부모님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나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었다면 과감하게 끊어내고 내 삶의 밝음을 향해 가도 좋다고 스스로 믿으려고 한다.      


반쯤은 익명인 공간이라 억울함과 분노를 등에 업고 거침없이 적어 내려왔는데 막상 글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뜨거운 눈물이 터져 흐른다. 늘 시기별로 나와 친했던 친구들의 따뜻하고 허당미 가득하던 아버지들을 부러워했던 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렇게 내내 사랑에 목마르고 애잔했던 세월도 조금은 뒤로하려 한다. 그저 내가 우리 딸아이에게 좋은 부모로 남기 위해, 부모로서의 나 자신이 고집스럽고 냉정했던 아빠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긴 세월 한 호흡으로 말한 적 없는 이야기를 터놓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 내 고통스러운 인생 한 장을 거칠게 뜯어버린 느낌. 내일이 나의 또 새로운 시작이 되기를.

뒤틀리지 않은, 여유롭고 사랑이 가득한 부모가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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