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이 나를 지킨다.
홍콩정부에서 11월 한 달 동안 진행한 걷기대회가 끝났다. 나는 비슷한 일상 패턴을 갖고 있는 지인 두 명과 매일 평균 만 천보 정도를 걸었다. 30일간 우리 세 명의 누적 걸음 수는 백만 걸음 정도. 우리의 일상은 단순하다. 새벽 여섯시쯤 기상해서 아이들 도시락과 간식을 싸고 아침 식사를 차린다. 먹이고 입히고 씻겨서 후다닥 학교에 보내고 나선 곧바로 근처 산길을 걷는다. 사실상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하고 오롯한 시간이 이 걷는 시간이다. 매일같이 걷는 길에서 항상 마주치는 사람들이 있다. 한여름이 지나고 12월까지도 선선한 가을 날씨가 길게 이어지는 홍콩은 걷고 뛰기에 너무 좋은 날씨를 갖고 있다. 그 덕분인지 고령의 노인들도 걷는 길에서 자주 마주친다. 깡마른 체형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허리춤에 복대를 차고 꼿꼿하게 걷고 뛰는 모습을 보면 나의 아침이 덩달아 꼿꼿해 지는 느낌이 든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애매한 시간에 현관문을 호기롭게 박차고 나오면 그날의 시작은 늘 상쾌하다. 비록 세수도 안한 맨얼굴에 썬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채로 나온 탓에 실상은 전혀 깨끗지 못하지만 폐부 깊숙이 훅- 하고 밀고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숨통을 번쩍 열어준다. 하루살이처럼 운동을 잠시라도 쉬면 몸이 굳어버리는 아찔한 체력이지만 오늘 하루라도 아가미를 잘 파닥 버리며 건강히 호흡할 수 있도록 파란하늘과 맑은 공기가 기운찬 펌프질로 나의 하루를 맹렬히 응원해주는 느낌이 든다.
비슷한 5km 이지만 the peak로 야트막하게 산길을 오를때도 있고, 홍콩 센트럴이 내려다 보이는 산책로를 둘레길처럼 걸을때도 있다. 내가 밟는 길과 풍경에 재미난 자극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비릿한 개오줌과 질퍽한 개똥이 난무하는 산책로에서는 간혹 유모차에 뉘여져 빵긋거리는 어린 아기들의 웃음이 미소를 짓게 하는 전부이다. 특별할 것이 없는 산길을 걷다보면 때론 무척 지루하고 무료하다. 바람은 쌀쌀해도 햇볕은 따사로운 편인데 볕이 환히 내려쬐는 길을 걷다보면 정신이 더더욱 몽롱해진다. 하지만 매일같이 걷는 쳇바퀴 같은, 매우 보통의 산책로에서 비로소 나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마음의 평화를 누린지가 오래되어 이게 '되찾았다'고 해얄지 그냥 '찾았다'고 해얄지도 애매할 지경이었다. 마치 내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 내 마음과 일상이 겉도는 것 같을 때, 맹목적으로 책을 펴고 무작정 읽어 내려갔던 것처럼 지루한 아침 걷기 시간동안 나는 지루한 길의 끝에서 깊숙한 내면의 나를 매일 만난다.
낮의 일상에서 쌓아두었던 걱정들과 상념들을 하나씩 풀어보면서 생각보다 사소했던 문제들은 길 한켠에 툭툭 흘려버린다. 목표했던 공부나 운동이나 아이교육문제들은 때론 동행자에게 조언을 구하고 마음으로 해결책을 세워나간다. 집에서 늘어진 모습으로 끙끙거려봐야 제자리 걸음이었을 문제들이 길 위에선 훌훌 잘 털려나간다. 걷고 돌아오는 길에는 거의 매일 집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 식사 계획을 짠다. 집에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살림에 필요한 무언가들을 사기위해 금세 뚜벅뚜벅 집을 나서거나 요가 수업을 간다. 매주 수요일 아홉시에는 얼마 전에 시작한 테니스강습을 받는다. 오전에 집 앞에서 장을 보았지만 식구들이 좋아하는 빵을 사러, 혹은 해산물을 사러 서로 다른 지역으로 장을 보러 또 떠난다. 간혹 이케아나 리빙샵에 가서 필요한 소가구도 구매한다. 병원비가 비싼 홍콩에서 자주 아픈 딸을 위해 기관지염과 객담 배출에 좋은 약이 싼 약국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고 틈날 때마다 쟁인다. 학교 행사는 어찌나 많은지 각종 코스튬과 아이 친구 생일선물을 사는 것도 빈번한 일상이다. 미드레벨 산중턱에서 코스웨이 베이나 완차이 시내까지 갔다가 걸어오면서 이거저거 구매하며 돌아오면 아이가 학교에서 올 시간이 가까워진다. 소비한 모든 것들을 가득 짊어진 채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면 시원한 커피한잔이 너무 간절해진다. 그러나 양손 가득 찬 장바구니 덕에 커피를 마실 여력이 없다. 아이 하원시간까지 삼십분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어디 카페에 들어가 고즈넉하게 커피 한잔 즐길 마음의 여유는 더더욱 없다. 오늘은 책 좀 읽어보겠다고 친한 동생이 한국에서 사다준 서적을 굳이 가방에 넣어왔는데 오히려 짐만 되었다. 기진맥진 집에 도착하면 오후 두시반 전후가 된다. 걷기앱에는 만 오천보 가량이 찍혀있다. 걷기 대회 기간엔 집에서 움직이는 걸음수도 아까워서 애플워치를 사려고도 했지만 굳이.. 라는 생각에 사지 않았다.
새벽 여섯시부터 오후 세시까지의 이 여정 속에서 나는 거의 혼자 시간을 보낸다. 아침 산책이나 등산에 동행자가 있을 때도 있지만 각자의 아이들은 너무나 자주 아프고, 가정보육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엄마들을 각종 행사로 꽤나 자주 호출한다. 한국에서 하지 못했던 엄마노릇을 하려고 부지런히 참여한다. 이런저런 사유로 매일을 여는 걷기 루틴을 함께 하지 못할 때 동행자와 나는 늘 탄식한다. 무심하고 지루하게 그저 나가서 걷는, 보잘것 없는 하루의 루틴을 내일은 부디 지켜내자고 함께 다짐한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온 이후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 아니기에 우리는 매일 아침 잠이 아니라 걷기를 택한다. 그리고 엄마로써, 아내로써, 나로써 하루를 잘 버텨내기 위해 틈날때마다 홈트레이닝을 하고 걷고 또 산을 오른다. 그리고 가족의 건강한 끼니와 부족함 없는 하루를 보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 땐 각종 회식과 저녁약속이 주를 이루었고 일찍 귀가하는 날에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다가 아이가 잠들면 닭발, 불족발 같이 자극적인 배달음식과 와인으로 하루를 불태우듯 끝마쳤다. 하지만 홍콩에 온 이후로 일년동안 외식은 주말 한두끼 정도가 전부다. 더 이상 배달음식도 시키지 않는다. 바질페스토나 토마토소스, 각종 샐러드 드레싱, 간단한 빵과 수프, 그리고 한식을 포함한 각종 요리들은 모두 집에서 만든다. 남편은 술도 좋아하지 않는데 밖에서 이런저런 술자리로 평일에 이틀 정도만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대신 흑장미로 나서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에 그저 남편이 좋아하는 맛있는 집밥을 푸짐하게 대접해주려고 노력한다. 아이를 재우고 쉬다가 남편이 늦어지면 간해독제와 소화제를 챙겨두고 내일 새벽 기상을 위해 먼저 잠이 든다. 오늘도 남편은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귀가하지 못한 채 3차 술자리에서 고생을 하고 있다. 늘 우리 가족을 위해 '아등바등의 마음' 으로 산다고 신세한탄을 했던 남편. 괜시리 짠해서 나의 지루한 일상이 더욱 감사해졌다. 남편 덕분에 휴직도 하고, 오전에 마음껏 나를 위해 걷고 운동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이 루틴을 더 소중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까운 지인들과 술 한 잔 기울이는 저녁이 사라진 재미없는 일상이지만 이곳에서는 나는 지나치는 사람 대부분이 나를 알지 못하고, 나에게 관심이 없다. 그래서 홀로 외롭게 남겨지다못해 단조로움의 극치를 찍은 이 지루함이 미치게 좋다. 나랑 결이 잘 맞는 소수의 사람과 소통할 선택권이 생겼고, 일한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신경 쓸 수 있다. 또 가만히 앉아있어도 고통스럽게 아프던 내 몸을 돌 볼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쳇바퀴 같은 루틴이, 가십과 소란함이 배제된 나의 홀로된 일상이 나를 단단하게 지켜주는 느낌이다. 내일도 꼭 등산 갔다가 요가를 가서 더 튼튼해져야지_ 라는 다짐을 하며 여느 때처럼 소화제와 간해독제를 식탁에 챙겨둔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건 언제나 마찬가지지만 하루라도 더 건강하고 활기차고 나를 들여다 볼수 있는 내일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나는 아주 무료하고, 아주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