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뚜라미 Jan 30. 2024

매일 웃는 일만 있다가는 입모양이 조커처럼 될지도 몰라

나는 따수운 삶을 지향하는 회색인간이다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며 살다 보니 종종 아이 친구 부모들이나 학교 선생님들과 짧고 긴 대화를 할 때가 있다. 대화는 늘상 how’s going이나 how are you같이 예측 가능하고 구태의연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영어를 처음 접했던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수 십 년 동안 아마 가장 많이 연습한 문장이었을 텐데 묻는 것도, 대답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저런 안부를 묻는 문화권 태생이 아닌 한계일까. 저 표현이 영어권 국가에서는 진짜 내 안부를 묻는 것이 라기보단 ‘안녕’이라는 인사에 준한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음에도 나에게는 저 질문이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언젠가는 진지하게 진짜 내 기분을 얘기하게 될 것만 같은 불안함에 유튜브에 ‘영어 안부 인사 대답’ 같은 것들을 검색해서 대화문을 달달 외워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how are you?라고 물어올 때마다 나는 어색하게 매우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변을 애매하게 뭉개곤 한다. 표정과 마음의 불일치라고나 할까. 날씨도 별로고, 오늘 아침에 허리 통증으로 삭신이 쑤시고 어젯밤엔 잠을 잘 못 자서 기력도 없는데 도저히 great! fine!이라고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쩌다가 영미권 사람들은 인사말로 답이 정해진 안부 다이얼로그를 사용하게 된 걸까. 

    

왜 달달 외운 대화문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지 꽤 오랜 시간 고민해 봤다. 아마도 나는 내 기분에 상관없이 긍정의 시그널을 번쩍이는 것이 상대에 대한 일종의 기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진짜 속마음은 쏙 감춘 채로 영화 <로마의 휴일>이나 <러브 액추얼리> 한 장면같이 아름답고 환상적인, 한낮의 따스한 태양 같은 삶을 연기하는 느낌이 싫었다. how are you에 fine이라고 답하는 모두가 실제로 연기하듯이 작위적인 겉치레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누가 how are you라고 물었을 때 진짜 내 기분이나 안부를 전할 게 아니라면 어색한 웃음을 띠우는 것이 보다 나답다는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현실에서 나라는 사람은 늘 밝고 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는 모든 행위에 나에게는 어색하다. 그래서 때때로 필요에 의해 사회적 가면을 쓰고 모든 것을 긍정하는 모습으로 나의 에너지를 끌어올리려 하면 무채색 인간인 나의 자아와 신체는 너덜거릴 정도로 무너져 내린다. 마치 자기부정의 대가를 호되게 치르는 것처럼.     


십 대, 이십 대의 나는 꽤나 밝고 휘황찬란하게 긍정의 빛을 쏘아 올리던 사람이었다. 매일이 축제 같아야 했고, 매 순간 전진하듯 밝음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늘 붉게 상기된 채로 눈을 떴던 일상이었다. 그것이 정말 맞지 않았던 삶의 가면일 뿐이었던 건지, 혹은 세월에 의해 빛이 쇠락한 것인지 요즈음엔 어쩌다가 초 긍정 상태의 상대를 만나면 숨을 편히 쉴 수가 없다. 가슴이 갑갑해진다. 어둑한 침묵은 허용할 수 없다는 무언의 분위기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기분이 별로여도 ‘fine’이라고 스스로에게 외쳐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긍정의 메시지가 내겐 너무나 버거워졌다. 그 상대의 기운찬 모습이 질투 난다거나 보기 싫다거나 하는 비뚤어진 마음은 전혀 없다. 외려 긍정도 낙담도 아닌 중간지대에 나를 지탱할 수 있게 좋은 영향을 줘서 고마운 마음이 컸다.      


얼마 전 토크쇼에 나온 유명 여배우와 슈퍼모델의 만담을 들으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확실히 알게 됐다. 어둠과 우울, 분노와 슬픔의 감정을 충분히 격려하고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사람. 오랜만에 매체에 나온 유명 여배우는 마흔이 넘었는데도 예전에 내가 좋아했던 그녀의 드라마에서처럼 여전히 예뻤고 맑고 화창했다. 말투나 제스처 하나하나가 상대를 배려하고 있었고 연인에 대한 소문과 루머에 대처하는 그녀의 자세도 무척이나 건강했다. 그런데 그 영상을 보며 정작 스크린 밖의 나는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흠결 없는 그녀의 피부만큼이나 완벽하게, 모든 장애물을 다 해치워 이겨낼 수 있다는 그녀의 자신감이 거대한 풍선처럼 스크린을 숨 쉴 틈 없이 가득 채웠다. 시종일관 깔깔대며 거침없이 Fineeeeeee!!! 을 외치는 그녀의 위용은 의기양양하게 모든 순간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재미교포라서 그런 사회적 가면이 덧씌워진 느낌이 드는 걸까.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불편감을 느끼는 나 자신이 처음에는 이상하고 못나 보이다가 이내 이해가 되었다. 나랑 너무 다른 사람이기에 느꼈던 이질감이지 싫어하는 마음은 아니라는 것. 직접 눈앞에서 대면하면 너무나 부담스러운 밝음이지만 그런 기운찬 사람들이 내뿜는 밝음의 끄트머리쯤에서 이따금 우울할 때 볕은 얻어 쬐고 싶은 회색 인간의 모습이 나였다.      


유채색의 십 대와 뭉크의 <절규> 같은 이십 대를 지나 무채색의 삼십 대를 살고 있다. 모든 대상을 사랑하며 사유하고 싶었던 열정의 불꽃은 사그라 들었지만 차가운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유령 같은 시절도 지났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적정한 온도를 지키며 차분한 현재를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이 참 소중하다. 눈물 나게 깔깔 웃어젖힐 수 있는 기쁨의 순간이 줄었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가볍게 달려들었다가 세게 부딪쳐서 아파할 일도 줄었다. 내게 두렵고 위험한 것들을 잘 인지하게 되었고 내 우울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도 어렴풋 알게 되었다. 공중에서 날뛰던 나를 바닥으로 내려 앉힌 대신 땅을 밟고 작은 보폭으로 서걱서걱 걷는 기쁨을 얻었다. 때론 기뻐하고, 때론 슬퍼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가 토닥이고 응원할 수 있는 마음의 거울을 찾았다.    

  

매일 웃을 일이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 특별히 크게 웃을 일이 생기지 않아도, 픽 웃거나 엷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작은 해프닝 하나면 며칠을 포근히 보낼 수 있다. 예전에 개그맨 이경규 씨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매일 웃고 행복했다가는 심장마비 걸린다고. 낙담하고 지친 내 자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따습고 깊은 웅덩이만 있다면 매일 웃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당장 이번 주에도 아이 학교에 가서 엄마들과 길고 짧은 대화를 해야 할 텐데 과연 내가 연습한 대로 안부를 전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지금까지처럼, 여느 내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Fine이라는 단어의 끝을 흐리더라도 그 이후의 대화에서 진실 되게,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내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전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거짓 없이 솔직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투명한 사람,이라는 건 문화권을 초월해서 느껴질 수 있는 거니까.      


나는 때론 우울하고, 참을 성 없고, 분노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회색 인간이다.

긍정적인 척만 하고 살기에는 이젠 너무 나를 알아버렸다. 

그래서 나의 어둠을 인정하고 사랑한다. 

아주 가끔씩만 기백이 넘치는, 미지근하게 따수운 그런 삶을 조용히 지켜나가자. 


작가의 이전글 아빠와 두 번째 의절을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