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란하지 않은 곳에도 파랑새는 있다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이 전해졌을 때 생각보다 덤덤했다. 오히려 수상발표 이후 한강 작가의 조용한 행보나 인터뷰를 보면서 수많은 생각들이 똬리를 틀며 수시로 마음을 쑤셔댔고 운동을 할 때, 마트에서 장을 볼 때, 양치질을 할 때조차 무방비한 상태에서 자꾸만 고요한 외침으로 머릿속에서 한강 작가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술은 못 드신다, 여기까진 아 그럴 수 있지 싶었는데 건강을 위해 , 더 열심히 글을 쓰기 위해 커피까지 끊으셨다는 말을 듣곤 약간 충격을 받았다. 커피까지 안 마시면 대체 인생에 어떤 낙을 누리고 계신가요.. 작가님..?이라는 물음을 혼자 읊조리자마자 예상했다는 듯 작가님은 말씀하셨다. '다들 저에게 낙이 무엇이냐 물으시는데, 저는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 저도 걷는 거 좋아하는데요,, 좋아하고요,,라고 무언의 반항을 하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멈추었다. 어쩌다 나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조금 깊은 대화가 되는 인연들을 새롭게 만나게 될 때마다 다급하게 좇듯이 물어왔던 '낙의 행방'. 인생의 낙이라는 것이 어떤 필요 충족 조건으로 찾아지는 파랑새가 아닌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자꾸만 어떤 정답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리 묻고 저리 물어온 나의 어린 마음. 건강한 신체로 평온하게 글 쓰는 일상이 주는 충족감을 스스로의 내면에서 잘 발견하고 과감히 커피라는 작은 행복을 내려놓을 용기를 가진 한강 작가님의 단단한 마음이 노벨상 수상이라는 화려한 결과물보다 훨씬 더 값지고 존경스러웠다. 삶의 우선순위인 글쓰기와 건강을 지키기 위해 구태의연한 변명이나 합리화 없이 중요한 것들에 더욱 집중하는 현명함. 그리고 저 집중을 이어나가는 마음 지구력.
일을 하거나, 내면의 무언가를 끄집어 글을 쓰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 술이나 커피 같은 것들의 보조 없이, 더욱 맑은 정신과 신체로 오롯이 창작의 고통을 견디고 되려 어디에 취해서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점에서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 비단 꼭 글쓰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살면서 공허한 시간을 채우려고, 늘 긴장되어 있는 스스로를 슬쩍 내려놓으려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육아가 끝난 꿀 같은 저녁시간을 충분히 달게 보상받고 싶다는 마음으로 알코올과 커피 등 말초를 자극하는 것들을 끝끝내 놓지 못하고 사는 삶을 또 가만히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현명해지려고 부단히 노력해 온 것 같았는데 한편으론 내가 나를 아직은 덜 아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기 관리'라는 키워드에 많은 설명들이 붙겠지만 진서연 배우가 말한 것처럼 '내가 나의 엄마가 된 것처럼 살뜰히 나를 챙기는 것'이 진짜 자기 관리인데 지금까진 나는 나를 그저 나쁜 것들로부터 제한하려고만 하며 살았던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더더욱 벗어나기 힘들고 폭주하고 과음하고 '이게 낙이지'라는 변명으로 하루를 허무하게 마감해 온 시간들.
한강 작가님 인터뷰 구절 중에 '지금 잔치를 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던 말. 정말 본인이 쓴 작품들의 색깔처럼 사치스럽지 않고 꾸밈없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가득 불러일으켰다. 온 세상이 인정중독으로 뒤덮여서 사람들이 죄다 카메라를 켜고 스스로를 가리킨 채 분 초 단위로 자신이 어떤 대단한 사람들을 만나, 무슨 음식을 먹고 있고, 어떤 여행지를 갔고, 얼마나 팬시 하게 살고 있는지 찍어 올리는 삶을 살고 있는 세상에서 참으로 피로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이 큰 상을 받고도 조금의 요동도 없이 이전과 같은 삶을 살 것이라는 선언을 하며, 상의 의미부터 좀 생각해 봐야겠다는 작가님의 모습은 노벨상 수상이라는 화려한 결과물 자체보다 훨씬 더 존경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무리 스스로가 전시되고 높여지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성향이라 하더라도, 영혼으로 낳은 자식 같은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널리 의미가 되새겨졌다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 뛰는 일일 텐데 아마도 저런 것들은 결과물일 뿐 창작 자체의 과정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트로피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전시하는 삶을 좋지 않게 보면서도 누군가의 관심이 참 좋고, 그 관심들에 쉽게 현혹되는 약한 내면이 나의 기저에는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걸 넘어서야 인정중독이나 어떤 마음의 결핍들에서도 해방되고 좀 더 쉽게 일상에서 자주 행복한 순간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 때 교보문고에 서서 완독 했던 한강작가님의 책은 상상력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폐부를 찔러서 약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다 읽고 청계천을 걸으면서 입맛이 다 떨어져서 저녁도 굶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기분이 내내 한참 좋지 않았다. 그리곤 나와 감정선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두 번은 읽지 않았다. 물론 문학적으로 가치가 낮거나 하다는 건 아닌데 마음의 평안을 위해 책을 읽는 나로서는 내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책이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를 여러 번 돌려보고 또 돌려보면서 조용하고 낮은 작가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계속 위로가 되었다. 기쁨도 슬픔도 혼자 짊어지느라 힘들었을 것은 작가님이셨을 텐데 오히려 내가 위로받는 느낌. 노벨상을 받은 건 작가님인데 이런 묵직하고 맑은 사람이 존재해 줘서, 그냥 삶을 바라보고 싶은 사람으로 있어줘서 참 좋은 기운을 받는 느낌.
요즘 많이 우울하기도 하고 , 그렇다고 엉엉 울 정도로 슬픈 일이 있다거나 한건 아니지만 침잠해 있는 어떠한 감정들이 있고 해소되지 않아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도망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님이 말했다. 도망갔다 돌아와도 다시 오면 그 문제는 그대로 그 자리에 다시 있으니 맞서야 한다고.
외롭고 갑갑하지만 그래도 두서없이 적어 내릴 수 있어서 좋다. 힘들 때마다 작가님 인터뷰 계속 틀어놔야지. 화려하지 않아도, 내 삶이 자극으로 가득 차지 않아도. 눈앞에 나의 친한 친구들이 있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마음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고 고마운 마음들과 아끼는 생각들을 계속 곱씹고 기억하고 기록하며 생생하게 하루를 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