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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Oct 15. 2020

좀 달라졌지만, 그래도 계속되는

코로나시대, 50개의 단상 (11~20)

코로나시대, 50개의 단상을 정리하는 백일 프로젝트 중 2번째 글.

11. 드라이빙 쓰루 쇼핑

막히는 간선도로 진입로. 잡상인이 물건을 판다. 코털깎이, 실리콘 그릇 덮개 그리고 두어 가지 더 있었던 것 같다. 상품 배너를 가로등에 달아서 홍보 중이었다.

내가 깜빡이를 넣자 상인이 상품을 끌어안고 저 멀리서 달려온다. 뭘 살지 모르니 몽땅 들고 왔다. 이것이야 말로 드라이브 쓰루 쇼핑이 아닌가. 실리콘 덮개를 샀다. 홈쇼핑 히트상품이라고 한다. 5천 원. 식약처 기준 통과 표시도 되어있었다. 충동구매였지만 원래 필요한 거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실제로 쓸지는 모르겠지만 갖고 싶었던 건 맞다.

원래도 지하철 등에서 잡상인 물건을 잘 샀다. 그 순간 사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빠르게 현금을 꺼내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공동체의 상거래 합의를 깬 판매지만, 그래서 어쩐지 유혹적이다. 서울 부동산 가격이 포함되지 않은 가격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있다. 사실 깜빡이를 넣는 순간 달려오는 상인의 반가운 발걸음을 보는 순간이 좋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계획에 없던 거래로 잠시 스치는 순간, 지루한 길 위에 작은 반짝임이 되는 순간.


12. 세상의 끝

거리두기 2.5단계는 쉽지 않은 기간이었다. 나는 계속 여행 중인 사람이니 집에 붙어있을 수는 없었다. 허나 숙박이 필요한 지역으로 가는 건 쉽지 않았다. 당일치기로 몇 번 동해를 다녀왔지만 한계가 있었다. 결국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북쪽으로 향했다. 수도권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찾아갈 수 있는 도보 여행지. 그렇게 시작한 것이 DMZ 접경지역의 평화누리길이다.(관련 글 : 평화누리길) 각 코스를 찾아 북쪽을 향해 자유로를 탈 때마다 늘 세상의 끝으로 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에서 남쪽, 동쪽, 서쪽으로 계속 가면 바다가 나온다. 하지만 북쪽은 강이 나온다. 그리고 강 너머에 갈 수 없는 땅이 보인다. 길을 향하는 기분은 매번 묘하다. 갈 수 없는 방향을 향해가는 길. 맑은 하늘, 펼쳐진 평야, 저 너머 강. 말하자면, 세상의 끝으로 향해가는 기분이다.


13. 함께하면 많이 먹음

올해 처음으로 동행이 있는 등산을 했다. 그동안은 내내 혼자 다녔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고, 체력 수준에 등산가들과 다닐 수준이 아닌 듯하여 혼자 천천히 내 속도로 다녔다. 이번엔 마침 추석 연휴에 등산하려는 동지들이 생겨 함께 청계산을 올랐다. 체력에 자신감이 좀 생긴 것도 있었고.

막상 같이 산을 올라보니 혼자 하나 같이 하나 등산 자체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하산 후가 달랐다. 식당에서 식사를 시키고 요리를 추가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파전이라거나 파전이라거나 파전. 등산 후에 먹는 파전이야 말로 함께함의 가치구나. 하긴 등산이 뭐가 중요해. 날씨 좋은 가을 오후, 중요한 건 해물파전뿐이야.


14. 성묘, 그리고 전쟁 이야기

아버지가 장남이다. 올해는 코로나라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고, 몇 가지 사정이 있어 고향에는 나 혼자 내려가게 되었다. 사람이 북적이던 명절을 차분하고 조용하게 지냈다. 장남은 형제들 없이 묵묵히 과일을 깎았다. 사람들이 없다 보니 아빠가 산소의 사연들을 하나 둘 얘기해주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때 20대 초반의 나이로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한 작은할아버지 산소가 있었다. 시골집에 빛바랜 국가유공자의 집 팻말이 걸려있던 기억이 났다. 작은할아버지는 갓 스물이 넘은 부인과 돌이 지난 아들을 두고 전사했다. 우체부가 유골을 배달해서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한두 해가 지나서 나무꾼이 산에서 작은할아버지 시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신원을 알려주는 수첩과 함께 발견되었다고. 그럼 배달된 유골은 누구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전쟁이란 그런 것 같다고. 그래서 다시 장례를 치르고 묘를 썼다고 한다. 아빠를 예뻐했던 그 어린 숙모는 결국 주변의 설득으로 재가했다고 한다. 아빠는 이 모든 것이 마치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하고 담담하게 얘기했다.

15. 배롱나무 꽃향기

공원을 걷다가 강한 향기에 끌려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작고 귀여운 꽃이 가득하다. 앱의 꽃 검색으로 검색해보니 배롱나무라고 한다. 꽃이 백일을 넘게 핀다고 백일홍이라고도 한다고. 봄꽃처럼 생겼는데 가을에 피네. 곧 낙엽이 지고 붉은 잎들이 바닥을 구르겠지. 그런 시절을 앞두고 하얀 꽃이 피다니 계절은 참 묘하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계절이 변화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겨울은 가고 봄은 온다는 것을 새삼 떠올린다.

16. 고양이는 짖지 않아.

논밭길을 걷다 보면 개를 많이 마주친다. 개들은 모두 날 싫어한다.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아니, 좋아할 수도 있다. 종일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인데 낯선 사람이 나타나니 좋을 것이다. 그 핑계로 신나게 짖어대도 좋으니까. 이유야 뭐가 되었건 짖는다. 나를 보고 아주 요란하고 시끄럽게 짖는다. 처음엔 놀라기도 하고 되도록 멀리 걷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그래 뭐 맘대로 해라 하는 심정으로 지나간다. 작고 어린 개일 수록 요란하다. 가끔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늙은 동네 개들도 보는데 그런 개들은 극도로 무관심한 표정을 하고 있다. 바닥에 퍼져서는 내가 지나가면 '그러던가 말던가'하는 표정으로 실눈 뜨고 본다.

시골길엔 고양이는 생각보다 잘 안 보였다. 그러다 며칠 전 어느 마을 어귀에서 동네 고양이를 만났다. 길목에 딱 자리 잡고 뚫어져라 쳐다본다. 왈왈 짖는 개 보다 더 신경 쓰였다. 귀여운 용모였지만 눈빛이 형형하여 멀찍이서 사진만 한 장 찍었다.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눈빛으로 말하더라고. 우리 동네에서 까불지 말라고. 그래서 눈 깔고 얌전하게 마을을 지났다. 고양이는 짖지 않지만 그래도 의사표현은 명확해.

17. 그래도 아기는 태어난다.

코로나 시기, 혼인율 출산율 모두가 줄어들거라 한다. 이 와중에 나는 조카가 하나 늘었다. 이런 시기에 임신을 하고 병원을 가야 했을 부부의 마음고생을 다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기는 세상에 왔고, 엄마와 아기 모두 건강하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문제는 물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 무슨 상황에서도 일어나는 일인 모양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인간의 노력과 번뇌도 함께 하지만 그조차도 운명 같은 거 아니겠나. 쉽지 않았을 시간을 거쳐 2020년의 아기가 왔다.

18. 하늘은 그대로

정동진에 갔다. 기차가 멈추자 거짓말처럼 푸른 바다와 하늘이 나타난다. 20년 전쯤 추위에 벌벌 떨며 일출을 보던 곳. 바가지, 노점, 혼잡 그리고 칼 같은 바람이 있던 곳. 이번에 갔더니 모든 게 변한 것 같았다. 세련된 관광지가 되었고 철길 위에 레일바이크가 구르고 있었다. 기억 속의 장소가 증발해버린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세월도 변하고 같이 온 사람도 변하고 하늘만 그대로였다.

19. 1단계가 되었다.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2.5단계의 엄혹하던 시간이 가고 2단계만 되어도 살 것 같더니 이제 1단계란다. 마치 ‘이제 너는 해방’이라는 말을 듣기라도 한 기분이다. 가을 지나가는 거 너무 아깝다 싶었는데 1단계라니 반가운 마음. 집 밖에 나가서 숨을 좀 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느끼는 게 나뿐은 아니라는 걸 잘 알겠다. 거리가 슬그머니 활기를 띠고 사람들이 스멀스멀 몰려나온다. 마음 한 켠에 불안을 안고 그래도 시원하게 마신다, 맥주.

20. 노래를 했다.

소속되어 있는 직장인 합창단에서 연습 영상과 녹음과제가 나왔다. 코로나로 모이지 못하자 영상을 합치거나 녹음본을 합쳐서 합창곡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것. 성의껏 녹음했지만 녹음을 할수록 한 두 군데는 반드시 음정이나 박자가 나간다. 녹음을 반복하면 목 상태가 더 안 좋아질 듯하여 중단하고 완전하지 않은 녹음본을 공유했다.

각기 다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최대한 같은 소리를 균질하게 내도록 노력한 음성파일을 보내는 것이 재미있다. 그걸 합쳐서 나오는 소리도 흥미롭고. 이 역시 코로나가 아니라면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덕분에 경험하게 된 일이기도 하다.


스무 번째 단상까지 끝났다. 이제 서른 번 남았다. 60일 뒤까지 코로나가 끝날리가 없어서 소재가 계속 있을 거라는 게 좀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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