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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인선 Nov 26. 2019

Elephant gun

내 삶이 불쌍해서 가끔 울곤 한다.

침대에 잠겨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어떤 이유로든 갑자기 사라지면 내 욕심으로 꽉꽉 밀어넣어진 이 가구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표지에 내 이름을 달아 선물 받은 책들은 다 어떻게 되지, 쓰다 남긴 캔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우선 나는 어떻게 하지?


이 가슴 저린 첫 문단을 쓰고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있었다.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곳에서의 답이 확실한 우울증. 이번에도 의사의 진단은 없었다. 그러나 시도때도 없이 죽음을 생각하고 남들에게서 숨어서 매일을 울며 보내던 나에게 의사의 진단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만 괜찮아지면 되지만 그게 안돼서 그러고 있었다. 우울증은 사람의 모습을 한다. 셀 수 없는 모습들. 우울은 저마다의 주인을 닮아있기에 나는 나를 닮은 우울을 죽이지 못했다. 낮이고 밤이고 눈에 새겨지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바다를 보면 바다에 빠져서 죽을 수 있을까, 아니 더러운 물은 싫다. 도로를 보면 도로에 뛰어들면 어떨까, 아니 여기는 차들이 너무 느긋하다. 집 계단을 오르면서 2층 난간에 목을 매달면 저 난간이 나를 죽일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미 그 시점에 죽은 몸뚱이가 어디로 떨어지건 상관없었다. 난간이 나를 곱게 죽인 뒤에 부서지든 말든 그건 이미 내 관심 밖이었다. 매일을 연락하던 친구들에게도 숨겨왔던 이야기다. 매일 나를 끼고 살던 부모님도 모르게 하려고 숨어 울었으니까 아마 모르지 않았을까 지레짐작할 뿐이다. 지금은 왜 우울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런 무드였다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참 억울하다. 분명히 힘들었는데, 나조차도 기억 못한다. 웃기다. 나도 잊어가면서 남이 기억해주고 이해해주길 바랐다니. 많은 게 변했다. 콧잔등에 땀이 맺히는 것도 모르면서 엉엉 이불 뜯어가며 서럽게 울던 계절에서, 입김 날리는 계절로 시간이 흘렀다. 나도 흘렀다. 집에서 밖으로. 정확히 기억나는 하나는, 이 게시글의 배경 사진은 죽고 싶어서 집 밖으로 나왔을 때 찍었던 바다에 깨지는 빛이었다. 이게 아름다워서 한참을 바닥에 앉아 바라보고 배고파서 집에 돌아갔었다.


잔뜩 취하고 싶을 때 듣는 곡이 있다. 15년도였을까, 친한 선배 한 명이 문득 먼지가 잔뜩 쌓인 제작소에서 작업 중에 좋은 노래라며 추천해줬었다. 추워서 난로를 잔뜩 가져다놓았던 겨울이었는지, 더워서 본드 냄새에도 창문을 열지 않고 에어컨을 켰던 여름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Beirut의 Elephant gun. 가사는 아무렴 상관없었다. 대충 말하는듯한 보컬, 가벼운 멜로디로 시작해 관악기로 받는 밴드 음악이 좋았다. 그 선배는 술을 마시고 이 노래를 들으면 더 알딸딸해지는 기분이라고 했었다. 알딸딸해지는 기분. 전주를 듣는 순간 이 노래를 그보다 더 잘 설명한 사람이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울고 싶거나 답답할 때, 술을 마시지 못하면 이 노래로 대신 취하곤 했다. 소리를 크게 키워서 이 노래와 나밖에 없는듯이 눈을 감고 한참 한곡반복을 했다. 따라부를 수 있을만큼 노래를 많이 듣게 됐을 때, 대체 이 보컬이 뭐라고 이렇게 대충 말하고 있는 걸까 싶어서 가사를 뒤지기 시작했다. 직역은 의미가 없었고 이 노래의 뜻을 잘 이해한 이의 해석이 필요했다. Elephant gun은 알면서도 묵인해왔던 불편한 진실이었다. 내 우울이 딱 그 모양새다. 나조차도 모른 체하는, 우습게도 항상 우울하다고 손끝으로 외치는 나의 우울을 알았던 이는 몇 없다. 지금까지도 아예 없다. 나만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겠냐고 나무라면 할 말이 없지만 진짜 없다. 이전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아서 말을 안했다면 지금은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길고 싫어서 못했다.


자꾸 내 동년배 여자들이 죽는다.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죽는다. 그게 안타까워서, 그 하나하나가 너무 분해서 못참겠다는 생각이 일상 중에도 자꾸 울컥 치솟는다. 말갛게 웃던 사람들이 자꾸 죽으니까 저 사람들도 이랬을까, 말 못하고 숨어서 울었을까 싶다. 한창인 사람들이 자꾸 죽는데 그 모습이 나를 닮은 것 같아서 심장이 자꾸 내려앉는다. 나는 내 삶이 불쌍해서 가끔 울고는 했는데, 그들도 그랬을까? 다른 사람들은 이 억울함을 어떻게 버티는 거지? 그 말갛던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자기를 죽였다는데, 아닌 거 다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딴 말들을 뱉는 거지? 어떻게 이 슬픔들을 포르노로 소비하는 거지? 내 심장이 발랑발랑 거리는 게 그렇게 신나는 일인가? 그런데도 나는 이 슬픔을 누구에게 말하지 않는다. 이 억울함을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못한다. 제발 생전에 떠올렸던 가장 행복을 닮은 곳에 도착했길.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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