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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인선 Jun 26. 2020

네가 유난히 잘 그려지는 새벽이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밤 넘기기

그런 날이 있다. 네가 유독 짙어지는 밤. 그런 날이면 난 이렇게 새벽을 꼬박 새워 너의 그림자를 떠올린다. 포개져본 기억도 없으면서 네 그림자를 그린다니, 어쩌면 이건 두 개의 그림자로 지냈던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너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평생을 못 잊는 말들이 있다. 밤이 미처 나를 걷어가지 못한 날은 애써 기억하지 않던 구절들이 나란히 눕는다. 어린 신체에 엮여 팽창하던 영혼이 했던 짓들은 희미한데, 신기하게도 유독 황홀하게 뱉어져 나에게 온 말들이 흩날리는 지난 순간들을 붙잡아 나의 기억을 잇는다. 흔해빠진 내 이름을 가만히 적어보곤 하던 넌, 안녕하니? 난 이런 밤을 잘 못 넘기는 어른이 되어 낮에 빚을 지고 산다. 어깨가 말랑했던 나이를 지난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 오늘도 이 새벽을 돼지 등의 비계처럼 붙어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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