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가 속해있는 카톡 단체방에서는 단연코 <눈물의 여왕> 이 화제다. 주말이면 배우 김수현, 김지원과 함께 울고 웃는다는 얘기로 도배가 된다. 하지만 내가 이 드라마에서 유독 마음이 가는 캐릭터는 바로 배우 김영민이 연기하는 용두리의 싱글남 '영송'이다. "저는 조금만 일해요, "라고 당당히 말하는 해맑은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 오디가 넘쳐나도 팔지 않고 동네 사람들과 나눠먹고, 일하고 남는 시간에는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손님에게 마들렌을 구워 매실차와 함께 대접하는 남자. 허리 휘도록 땡볕 아래서 뼈 빠지게 일해 돈을 버는 대신 뽀얀 살결을 유지하며 자급자족 슬로 라이프를 선택한 이 남자의 삶이 내가 추구하는 웰빙 라이프의 방향성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에서 지내면서 그 로망은 더욱 커졌다. 웰링턴 어퍼헛에 사는 친구네 동네 커뮤니티에서 70% 정도 자급자족을 하는 삶을 보고 “그래, 이게 미래구나,” 하고 무릎을 탁 쳤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정원사를 고용해서 양파, 마늘, 레몬, 야생 베리, 호박, 파프리카, 토마토, 가지, 허브 등 각종 채소를 실내외에서 키워 나눠 먹었다. 닭도 키워서 달걀을 얻었고 양봉도 했다. 커뮤니티 친목 도모용 카페 공간과 바비큐 그릴 장소도 별도로 지어 함께 사용한다. 일상에서 ‘따로 또 같이’를 실천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때부터 '코하우징(여러 세대의 개인 하우스 사이에 주방이나 마당, 세탁실과 같은 공동 공간을 만들어 커뮤니티 생활을 하는 협동 주거 형태)'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운명처럼 이끌리어 타우랑가에서 열린 <코하우징 워크숍>에도 참석했다.
강사님은 오클랜드의 ‘어스송 빌리지’라는 친환경 생태마을의 기획부터 완공까지 전 과정을 진두지휘한 건축가였다. 32채의 주택을 포함한 에코 커뮤니티 빌리지를 짓기 위해 공사다망했던 14년간의 여정을 들으니 "고생 꽤나 하셨겠구나, "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친환경 자재를 고집해서 지은 주택과 솔라패널을 설치해 전력수급을 하고 빗물 탱크로 물을 관리하며 유니버설 디자인을 고려한 조경과 보도, 텃밭 정원, 공유 주방과 주기적인 저녁 식사 모임 등의 다양한 정보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미래세대를 위해 지속가능성 관련 교육을 제공하는 목적으로 지자체에서 커뮤니티 공간 건축 비용을 지원받았다는 점도 참고할만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적으로 '생태마을'이나 '탄소제로마을'과 같은 친환경 커뮤니티 동네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이런 친환경 공동체가 세계적인 추세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뉴플리머스에서는 '퍼마컬처 전문가'를 만났다. 내가 머물렀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였는데 정원에 온갖 종류의 과실을 키우고 주말에는 관련 워크숍을 여는 분이셨다. 주차를 하고 짐을 갖고 계단을 내려가니 눈앞에 퍼마컬처 정원이 펼쳐졌다. 마침 이 분이 마당에서 분재작업을 하고 계셔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퍼마컬처가 무엇인가요? 유기농법과 다른 점은 뭐예요?" "퍼마컬처는 숲의 원리를 이용해 식물 간 공생 관계를 사용하고 자생력을 극대화해서 땅을 갈거나 농약, 비료, 퇴비를 주지 않는 말 그대로 자연재배 농법이에요. 유기농법은 화학적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농법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고요." 인간의 투입이 전혀 없다니 놀라웠다. "그래서 퍼마컬처는 초반의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뉴질랜드에서 특별히 뉴플리머스 지역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영국 웨일스 출신인데 뉴플리머스와 풍경이 비슷해요. 산과 바다가 있거든요. 특히 여긴 화산의 영향으로 미네랄이 풍부해서 토질 자체가 좋아요." "여기 정원도 둘러보시고 숲도 산책해 보세요."
대화를 마친 뒤에 정원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커다란 원 모양으로 둑처럼 쌓아 올려 군데군데 채소를 키우고 계셨다. 길게 늘어진 덩굴 사이로 호박이 열려있었다. 묵직해 보였다. 예전에 EBS <숲이 그린 집>의 일본 나가노 편에서 봤던 숲과 텃밭의 경계 없이 퍼마컬처를 하는 100% 자연순응방식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아마도 이 분은 워크숍과 교육 프로그램 운영에 집중하다 보니 이런 방식을 택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주변 화단의 각종 꽃나무와 복숭아, 레몬, 사과 등 과실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오색빛깔 나비들이 부지런히 그 주변을 맴돌고 있을 정도로. 처음 듣는 새소리를 들으니 경쾌한 기분이 들었다. 동일한 농법이라도 누가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구현 방식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가정집 정원 바로 옆에 오래된 작은 숲이 있다는 사실 또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었다.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관리해 줄 정도로 수백 년은 돼 보이는 나무들이 커다란 뿌리를 얼기설기 펼쳐 그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인공적인 정원과는 달리 사람의 손이 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숲 생태계. 피톤치드를 마시고자 깊게 호흡을 했다. 여기 머무는 동안 매일마다 산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양지바른 잔디에 놓인 양봉 상자도 볼 수 있었다.
기후 위기 시대에 "농업이 미래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농업이냐일 것이다. 몬산토처럼 화학 약품과 유전자 변형 물질로 점철된 환경파괴적 대량농업으로 이윤 극대화를 추구할 것인지, 아니면 유기농법으로 다품종 소량화를 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환경에 무해한 퍼마컬처 방식으로 자급자족을 할 것인지.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최근 들어 뉴질랜드에서 어느 지역에서 어떤 집을 짓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지하게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숲이 있고 그 근처에 텃밭 정원을 가꿀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송씨처럼 내가 먹고 주변에 나눌 정도로만 채소와 과일을 키울 수 있을 만큼. 조금만 일해서 지치지 않도록 말이다. 그게 지속가능한 웰빙 라이프이지 않을까 싶다. 손님이 오면 매실차에 마들렌 대신 콤부차에 글루텐프리 비건 쿠키를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이런 삶의 모습은 내겐 꿈같은 장면에 불과하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뉴질랜드 땅값이 많이 올랐고 뷰 좋고 숲이 있는 그런 널찍한 땅은 당연히 어마무시하게 비싸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게 함정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이 있다"라고 하지 않나. 오늘도 친환경 슬로 라이프라는 스위트한 꿈을 꾸며 힘차게 나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