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 영국기행 15] 지역사회에 밀접한 관여, 앵커 전략을 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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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벤트리편 전편에 이어 계속]
앵커 기관 (Anchor Institution)
그들이 상정하는 ‘사회적 대학’의 핵심 개념이다. 앵커란 말 그대로 지역사회에 깊이 정박한채 관여하고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기관을 칭한다. ‘나무처럼 뿌리내려’ 지역사회 한복판에 놓여있는 학교, 도서관, 병원, 스포츠센터, 시청사, 공공기관 등을 일컫는다.
“대학은 지역사회 발전과 재생에 커다란 임팩트를 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과 숙련된 인재들을 유입 및 배출하고 지역경제 주체들을 인큐베이팅하고 관련된 연구 등의 축적을 통하여 말이죠.”
예컨대 대학은 스스로 가진 부동산 자산을 통하여, 물건과 서비스에 대한 조달을 통하여, 지역경제 주체의 인큐베이팅과 네트워킹을 통하여, 지역재생을 추동하는 협업 사업을 통하여, 그리고 지역인재 교육과 고용을 통하여 등등 다양한 앵커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냥 있기만 한 앵커는 아니다. 사회혁신 방법론과 실천을 통해 새로운 플랫폼으로 조성해가자는 게 ‘사회적 대학’이다. 즉 지역발전과 별로 관계 없는 밑빠진 독에 물 붓는식의 투자가 아닌 실제 지역 내부로 돈이 순환하는 ‘내생적 발전전략'을 추구하고, 판에박힌 창업 인큐베이팅과 다른 도전적이면서 사회적 가치도 함께 창출하는 경제주체들의 요람으로 꾸려가자는 것이다.
영국은 물론 서구의 많은 대학들은 캠퍼스 울타리가 별도로 없다. 그저 도시 여기저기에 함께 뒤섞여 놓여있을 뿐이다. 이곳 코벤트리 역시 도시 한복판이 곧 대학이다. 대학의 주요 사이트들은 도시의 유명한 명소들과 아무런 경계 없이 연결되어 있다. 영국의 사회적기업 실천가들은 늘상 “사회적기업에 이익이 생기면 사회에 이익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마찬가지로 “대학이 활성화되면 도시도 발전한다”, 역으로 “도시에 이익이 생기면 대학에도 편익이 따른다”고 외칠 수 있을법한 일체가 된 환경이다.
앵커 전략을 통한 ‘사회적 대학’ 만들기 프로젝트는 이를 제대로된 방향으로, 밀접한 협업 하에 실질적으로 지역사회와 동반성장할 수 있게끔 모색하자는 제안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코벤트리는 ‘문화 도시(UK city of culture in 2021, 영국 정부에서 실시하는 일종의 지역재생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도 이를 충분히 인지했다. 꾸준히 ‘도시와 대학’의 공동운명체적 관계설정과 실천을 이어왔다. 코벤트리대학 사회적기업(CUSE)의 키이스와 캐롤은 “사회혁신 그룹들에게도 이 협업기반 프로젝트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릴라 로컬리즘... '커뮤니티 기업, 노동자 협동조합'에 일을 맡기다
여기 뿐만이 아니다. 혁신사례로 주목받는 도시들 역시 이러한 앵커 기관의 재발견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미국의 클리블랜드(Cleveland) 사례가 그러하고 영국에서 요근래 각광받고 있는 프레스턴(Preston) 또한 그러하다. 대학, 시청사, 박물관, 주택단지 등의 공공 앵커시설에 ‘사회적 가치’(social values)을 심어넣는 작업을 필두로, 그들이 지역에서 고용하고 소비하며 대안적 경제조직(노동자협동조합 등)과 계약해 일하게끔 환경을 조성했다. 대형 쇼핑몰 유치(제조업이 빠져나간 많은 영국 도시들에서 택한 전략) 등 외부투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며 좌절을 겪은 도시가 적극적인 내생 발전전략을 통해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영국의 언론와 유명 칼럼리스트 등은 프레스턴 지방정부와 혁신가들이 주도한 사례를 두고 ‘게릴라 로컬리즘’이라고 칭했다.
실제로 2013년 통계를 보면, 프레스턴에서 20파운드를 쓰면 1파운드 정도만 지역에 남았다. 나머지는 런던 본사나 글로벌 기업들에게로 빠져나갔다. 2013년 지역의 6개 공공기관에서 지역에서 소비하고 고용하며 순환시킨 돈은 3천8백만 파운드에 불과했다. 그러나 2017년에는 1억1천1백만파운드로 3배 가까이 늘었다. 지역 주택협회가 관리하는 사회주택(약 6,500호)에서는 외주화했던 각종 수리, 관리업무 등을 모두 커뮤니티 조직을 통하여 ‘내부화’(inhouse)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앵커 전략과 더불어, 대형마트가 투자를 멈춘 자리에 로컬 재래시장 개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나아가 사회적경제 등 대안사업들에 투자할 수 있는 지역기반 사회적금융 은행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이 지역사회의 주도권과 지배권을 되찾아오는 우리의 방식입니다” 지역에 천착한 활동가(Matthew Brown)가 <가디언> 인터뷰에서 던진 말이다. 영국 노동당 대표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도 고무됐다. 그는 토니 블레어로 상징되는 노동당의 ‘제3의 길’ 노선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센세이션을 등에 엎고 등장한 인물이다. 같은당 출신 지방정부의 새로운 실천에 대해 “혁신을 고무하는 사례”라며 진보의 미래에 대해 “프레스턴을 보라”고 가리켰다.
전날 밤 기숙사에 누워 이 사례 기사를 흥미로이 보았다. 다음날 CUSE 대표 키이스와 라이징 카페(Rising Cafe, 13편에서 소개)에서 점심을 함께하며 관련한 이야기를 꺼냈다. “굉장히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키이스는 듣자마자 “바로 그거야(That’s it!)”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우리가 이야기했던 민영화와 국유화를 동시에 극복하는 모습이 바로 그런 사례들”이라고 말했다. 코벤트리 역시 그러한 실천에 동참하는 중이라고 덧붙이면서.
사회적 대학 네트워크, 보수성 짙은 공간의 변화를 위해 뭉치다
앵커 전략과 사회적 대학에 대해 특히 궁금증을 보이자, 키이스는 흥미로운 자료를 건네주었다. 자유로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는 게 일상인 엔터프라이즈 허브에서, 개인 방이 따로 없는 이 사회적기업 대표자는 이날도 공유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며 “메일을 열어보라”고 말했다. 사회적 대학 네트워크(The Social University Network)를 소개하고 동참을 권유하는 워드 문서였다.
“영국의 고등교육기관들은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에 임팩트를 줄 수 있을지, 지역사회 이해관계자들(정부, 기부자, 공공영역, 커뮤니티 섹터 등)은 의미 있는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주요한 앵커 기관으로 지역사회에 자리매김하게끔 우리를 바라보는 경향들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대학을 바라보는 기대가 달라지는 상황에서, 이들의 문제의식은 “사회혁신과 사회적기업 영역을 통한 임팩트 확산”이 이에 응답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는 것. 대학을 바꾸는 전략은 여러가지일 수 있지만, ‘사회적 대학’ 주체들은 ‘사회혁신’을 주요한 방법론으로 채택하여 구체적으로는 사회적기업과 같이 지역사회와 시장에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주체들을 키우고 연결하는 혁신기지로서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 구성원들(학생, 교직원 등)과 대학이 가진 자원들을 ‘사회적’으로 활동하고 기능할 수 있게끔 교육하고 연구하며, 대학의 역할이 단지 학생들에게 학위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지속가능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앵커 기관으로 만들어가자는 설명이다.
사실 이는 굉장히 실용적인 접근이기도 하다. 또한 공공예산 삭감 기조에 맞서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대학을 재구성하겠다는 당찬 선언이기도 하다. 그런면에서 긴축재정(Austerity)이 사회혁신을 추동하고 있다는 키이스의 역설적인 말이 다시 상기된다. 예컨대 이들은 “사회적 대학은 학생들에게도 굉장히 매력적이다. 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더 풍부한 경험과 일자리 기회를 대학에서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한 연구 영역에도 “깊은 지역사회와의 연결을 통해 연구 범위와 효과를 확산하고 새로운 수입의 원천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역사회를 향해서는 “사회적 자본을 다지고 지역경제를 북돋는 전략을 통해 공동체에 편익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떤 대학을 ‘사회적 대학’으로 인식하고 칭할 수 있을까? 영국에서도 사회적 대학은 아직 명확하게 성립된 개념과 실체는 아니다. 뜻있는 대학 구성원들의 운동으로서 네트워크에 참여하며 만들어가는 중이다. 보수성 짙은 대학을 혁신하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 셈이다. 또한 ‘법적 제도적’ 인증이 아닌 만큼, 그들 스스로의 역할과 책무를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밝힘으로서 시작된다고 한다.
-사회혁신과 사회적기업가 관련 교과목을 교육과정에 심어넣는다.
-사회혁신가와 사회적기업가들이 새로운 사회적기업을 창조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사회적제품/서비스 구매를 통해 사회경제적 임팩트를 늘릴 수 있게끔 일한다.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대한 프로그램을 채택한다.
-사회혁신가와 사회적기업가들이 그들의 재능과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단, 공통적인 조건도 있는데 ‘사회적 대학 네트워크’의 제안에 따르면, 모든 사회적 대학들은 ‘장소성’(Place), ‘혁신’(Innovation), ‘시장’(Market), ‘인큐베이션’(Incubation) 등 4가지 영역을 포괄하여 활동하는 기관이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즉, 지역사회와 주민에 관여하는 장소성(Place), 사회혁신을 심어넣는 시장에서의 차별화된 위치선정(Market), 혁신생태계 지원(Innovation), 아이디어와 실천의 인큐베이팅(Incubation) 등의 공통된 기준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코벤트리에서의 2주 생활을 통해 때로는 현장에서, 강의실에서, 비즈니스에서, 회의에서, 개별 인터뷰를 통해, 비공식적 만남에서 두루두루 살펴본 것들이다. CUSE와 사회혁신가들의 활동상을 축약해놓은 공동의 미션으로 보였다. 그들을 지켜보고 함께 참여하며 나는 “당신들은 대학 속에서 경계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사회혁신가”로 표현했다. 키이스는 웃으며 “맞다. 그렇게 되기위해 노력 중”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4가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책임있는 전념(Commitment), 리더십(Leadership), 협력과 합작(Collaboration), 공유된 사회적 가치(Shared Social Value).
'혁신의 대상'이란 조롱을 넘어 '혁신의 추동기지'로!
낯선 땅의 경험들을 통해 한국사회를 돌아본다. 대학은 ‘혁신기지’이기는 커녕 ‘혁신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지역혁신을 지원하고 추동하는 대학?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좋든 싫든 대학은 구체적인 지역사회 공간 한복판에 존재하고, 묵직한 터를 자리하고 있다. 물리적인 하드웨어 공간은 물론, 많은 예산과 지식, 인적 자원들이 순환하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급속한 학령인구 감소 등의 한국사회 추세로 볼때, 대학으로서도 이제 단순한 ‘교육과 학위제공’ 가지고는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되고 있다. 슬픈 농촌현실을 보여주는 초중고 폐교의 애잔한 풍경이 이제 많은 대학들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많은 사회혁신 실천 사례들이 지역사회의 앵커시설을 거점으로 추동해내는 경우들을 보았다. 여기서 쓰이는 예산, 자원 등을 대기업과 다국적 프랜차이즈가 아닌 지역기반 협동조합, 사회적기업과 적극 연계하여 ‘진지’ 를 구축해가는 전략을 살펴보았다. 예컨대 서울의 경우,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학을 가지고 있는 도시다. 그동안 가진 관성에 따른 보수성 등 넘어야 할 산들이 많겠지만, 이러한 공간들을 어떻게 연결하고 개방하고 지역사회와 협력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히 짚고 넘어가며 대안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영국의 대학 못지 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한국의 대학은 역할과 정체성은 물론 존재이유와 생존의 차원에서도 대대적인 변화를 요구받는 시기다. ‘사회적 대학’은 하나의 훌륭한 길을 보여준다.
결국 사람으로 돌아온다. 제아무리 구조와 현실이 변화를 필요로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물꼬를 틀 사람이 없으면 지리한 현상유지가 지속될 뿐이다. 그런 면에서 혁신가가 필요하다. 코벤트리 역시, 대학과 지역사회를 넘나드는 ‘사회혁신가’들이 일궈가고 있는 사례다. 그들은 오늘도 대학의 관성, 관행과 줄다리기를 하며 ‘사회적 대학’을 만들어가기 위한 도전에 나서고 있다. 그저 알아서 바뀌고 주어지는 법은 없다. 코벤트리에서 재확인한 그러나 너무도 익숙한 진리다.
[다음 편(마지막 편)에 계속]
이 연재를 엮고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였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3617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