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의 내용을 책으로 출간함에 따라 앞부분 상당 부분을 삭제합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단연 중국이다. 인류의 행복이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지는 정확히 알 길이 없지만, 실제 역사에 가장 근접한 가늠을 가능하게 해주는 사례가 있다면, 역시 중국일 테다. 과거 산업자본주의가 서구 문명에 선물했던 것과 같은 근대적 경제 성장을, ‘행복’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지기 시작한 최근 몇십 년 동안 가장 압축적으로 겪은 나라가 바로 중국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가치조사(WVS)에 처음 참여한 1990년부터 2017년까지, 1인당 GDP가 4배 이상 증가하는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경제사학자들이 널리 사용하는 역사 통계인 메디슨 데이터베이스(Maddison Project Database, version 2020)에 따르면, 1990년 시점의 중국의 1인당 GDP는 2011년 달러로 $2,982로, 산업혁명기에 막 진입하는 1760년 영국의 그것($2,915)과 비슷한 수준이다(Wu, 2014; Broadberry et al. 2015). 역시 같은 자료에 따르면 영국의 경제가 중국의 2017년 1인당 GDP인 $12,734를 처음 능가하게 되는 건 1950년대다. 따라서, 이 27년 동안의 중국의 경제 성장은, 과거 서구 문명이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로 진입하고 그 한복판을 지나며 겪었던 성장과 양적으로 맞먹는 수준이었던 셈. 놀라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국민들의 행복은 1990년에 비해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 기간에 중국인들의 행복은 다소 감소했다가 2000년대 이후 다시 증가해 최근에야 애초의 수준을 회복하는 U자 궤적을 보여준다(그림3). 이스털린에 따르면, 세계가치총조사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행복에 관한 다른 조사 자료들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Easterlin, Morgan, Switek & Wang, 2012).
중국의 사례를 통해서,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은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실은 이스털린의 역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기본 욕구"가 충족되기 전 "일정 수준" 미만에서는 소득이 증가하면서 행복도 증가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이스털린의 역설을 가장 강력히 지지하는 중국의 사례에서는 그런 현상을 볼 수 없었기 때문. 세계은행은 최소한의 욕구조차 충족하지 못하는 극단적 빈곤을, 저소득 국가의 빈곤선으로부터 산정한 ‘하루 $1.9’의 국제 빈곤선을 기준으로 정의한 바 있다. 지난 글에서 이미 지적했듯, 지난 20여 년 동안 하루 $1.9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이 국제 빈곤선 기준의 극빈 상태에서 탈출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의 $1.9 미만 ‘극단적 빈곤’ 비율은 1990년 66.3%에서 2016년 0.5%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행복은 증가하지 않았다.
과거 인류의 생활 양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원시 부족민 사회의 행복을 조사함으로써도, 근대적 경제 성장을 겪기 전의 먼 과거 인류의 행복감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들 원시 부족민이 근대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산업 사회의 시민들보다 불행하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동아프리카 케냐에서 목축 생활을 하며, 케냐의 화폐 경제 바깥에서 수도도, 전기도 없이 살아가던 마사이족은 일반적으로 높은 수준의 행복을 보고했으며(Biswas-Diener et al., 2005), 남아프리카에서 목축 생활을 하는 힘바족 주민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조사에서도 이들 원시 부족민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선진국 가운데 하나인 영국의 성인들보다도 높은 수준의 행복을 누린다(Martin & Cooper, 2017). 수렵채집민 하드자 부족 역시 현대화된 삶을 사는 폴란드인들보다 더 높은 행복감을 보고하고 있다(Frackwiak et al., 2020).
그렇다면, 90년대에 중국인들의 행복이 경제가 성장하면서도 오히려 감소하고 2000년대 이후에야 다시 1990년 즈음의 수준을 회복한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경제 성장이 항상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면, 무엇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까? 세계행복보고서는, GDP 외에 행복을 예측하는 변수로서 건강 기대수명,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 등의 사회적 지지, 삶의 선택의 자유, 부패의 부재 등을 꼽는다(Helliwell & Wang, 2012). 2012년 처음 발표된 세계행복보고서에 수록된 연구에 의하면, 1인당 GDP를 포함한 이 다섯 변수가 지역 간 행복의 차이를 거의 대부분 설명한다고 한다.
하지만, 2017년 같은 보고서에 수록된 이스털린의 연구에 의하면 이 변수들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중국인들의 U자 궤적의 행복과 꼭 같은 궤적을 그리는 것은 없었다(Easterlin, Wang & Wang 2017). GDP는 꾸준히 오르고 있었으며, 기대수명 역시 증가세가 8-90년대에 한풀 꺾이긴 했지만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자유나 부패 측면에서는 GDP나 기대수명에 비해 뚜렷한 변화가 없었다. 대신, 이스털린은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 사이, 경제의 고속 성장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행복이 오히려 감소했던 이유를 실업과 사회안전망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같은 기간, 1인당 GDP를 비롯한 다른 사회적 변수들에 비해, 실업률 및 노후 연금과 헬스케어의 포괄범위(coverage)는 행복지수의 변화와 매우 유사한 궤적의 그래프를 보여준다는 것. 즉, 중국인들의 행복이 가장 바닥을 쳤을 2000년 초반 즈음에 중국인들의 실업률이 가장 높았고, 동시에 사회안전망으로부터의 보호는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이스털린에 따르면, 이후 실업률이 떨어지고 사회안전망도 회복되면서, 중국인들의 행복지수는 다시 증가하였다.
사회보장 수준은 중국뿐 아니라, 비슷한 소득 수준의 유럽 국가들 사이의 행복의 차이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에스핑-앤더슨의 '탈상품화' 개념에 기초해 사회복지제도를 지수화한 정치학자 스크럭스(Lyle Scruggs)의 지수를 유럽 복지국가들 사이에서 비교해본 결과,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등, 복지제도의 보장 수준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 나라들이,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등 복지 수준이 비교적 낮은 나라들에 비해 더 행복했다는 것(Easterlin, 2013). 이스털린은, 동독 역시 중국과 비슷한 사례라고 말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과거 사회주의 체제 하에 완전고용과 튼튼한 안전망을 보장받다가,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고 이런 제도들이 해체되며 건강, 일, 돌봄 등의 측면에 대한 만족도는 하락했다. 그 탓에 물질적 만족도는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전반적인 만족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이스털린은 이 유럽 국가들의 사례를 통해, 완전고용의 보장과 사회보장의 확대, 복지국가의 건설로써 더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스털린의 지적 이전에도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사회안전망이 행복과 유의미한 통계적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었다(DiTella, MacCulloch & Oswald, 2003). 국가와 연도 등 조사단위의 상수적 효과(고정효과)를 고려한 모형에서, 실업보험의 소득대체율은 일관되게 유럽 국가들의 행복도를 높여준 것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실업급여의 수급자만이 그 득을 보는 것이 아니고, 비실업자들의 표본에서도 소득대체율이 높아질수록 더 행복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실업에 대한 안전망이 사회 전반의 불안을 실제로 줄여주는 역할을 한 것.
(하략)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7479366&memberNo=29538049&navigationType=pu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