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낙관주의’의 또다른 강력한 내러티브는 우리의 세상이 점점 더 평화로워지고, 민주주의의 물결은 마침내 역사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 특히 스티븐 핑커는, 그의 전작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부터 뚝심있게 "인류의 폭력성은 감소하고, 더 평화로워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논쟁의 중심에 서왔다.
인류가 저질러온 폭력 중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폭력은 단연 전쟁이다. «지금 다시 계몽»은, 우리가 점점 평화로워지고 있다는 증거로 가장 극단적 폭력인 '전쟁'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한다. «계몽»이 전쟁의 감소세를 보여주는 증거로 인용하고 있는 그래프는 세 개다. 그 중 첫번째 그래프는 1500년 이후 열강 사이의 전쟁 햇수 비율('그림 11.1', p.249)이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도 스티븐 핑커는 ‘열강 사이의 전쟁 햇수 비율’이 감소한다는 기술적 사실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맥락을 누락하고 있다. 이 첫번째 그래프가 그려진 기간 동안 "열강 사이의 전쟁”은 줄어들었을지 모르겠지만 그 동시에, 분쟁의 일반적인 양상이 변해왔다. 즉 분쟁의 일반적 성격이 '열강 사이의 전쟁'으로부터 식민지 정복과 내전, 학살 따위로 옮겨져왔다는 중요한 사실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전쟁이 감소"한다며 '평화'의 추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의미를 크게 오도할 수 있다(Guilhot, 2018). '전쟁 햇수'라는 단위도 문제적이다. 같은 기간 동안 발휘할 수 있는 살상력 역시 증가해왔다는 사실관계를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종합적인 추이를 파악하려면 최소한, 17세기 열강 간 전쟁과 식민지 정복, 20세기의 내전 등, 살상력의 차이가 큰 서로 다른 형태의 분쟁들을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할 수 있는 단위로 그 수를 파악해야 한다. 즉 그 분쟁의 희생자 수를 헤아리는 게, ‘열강 사이 전쟁 햇수 비율’보다 타당한 접근일 테다.
그럼, 스티븐 핑커는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스티븐 핑커는 불과 몇 페이지 뒤에서 전쟁의 희생자 수 정보를 보여주고 있다. 바로 그가 전쟁이 줄어든다는 근거로 인용하고 있는 두 번째 그래프다('그림 11.2', p.252). 단, 이번에는 그래프가 1500년이 아니라 1946년부터 시작한다. 그래프에 의하면, 1946년 이후 전투 사망자 비율이 감소하고 있다. 그럼, 1945년 이전에는 비슷한 통계 자료가 없었던 걸까? 그렇지도 않다. 핑커가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전투의 직접 사망자만을 집계하지만, 간접 사망자까지 포함해 그보다 더 긴 시계열을 형성하고 있는 자료가 있다. 핑커가 책의 2부 전반에 걸쳐서 인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그래프가 ‘Our World In Data’라는 웹사이트에 정리되어 있는 자료들로 그려진 것인데, 이 웹사이트에서는 1400년 이후의 분쟁의 직간접 사망자 통계 역시 정리되어 있다. 아래의 그림1이 그 자료를 바탕으로 그려진 그래프다.
대략, 17세기 초의 30년 전쟁, 1800년 전후의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등, 몇 번의 큰 전쟁들이 중간의 휴지기들을 끼면서 큰 골짜기들을 만드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20세기 전반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은 그 이전 몇백 년 동안 벌어진 그 어떤 전쟁에 비해서도 높이 솟은 골짜기를 만들고 있다. y축을 로그 스케일로 바꿔준 아래 그림2의 그래프에서는, 갈수록 분쟁 사망자 수가 늘어나는 추세를 우상향하는 추세선을 통해 비교적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스티븐 핑커가 그토록 강조하는 1945년 이후의 '장기 평화'가 그 이전 시대 "전쟁들 사이에 낀 휴식기(«계몽», p. 248)"와는 다른 새로운 "장기적" 추세를 형성하고 있는지는, 그림1이나 그림2의 그래프에서는 불분명해 보인다.
아래 그림3은 15, 16, 20세기 분쟁 사망자들의 100년 동안의 추세를 나타내는 그래프들이 한 축 위에서 겹쳐지도록 그린 그래프다(Aguilera, 2020).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가장 높은 골짜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이고, 스티븐 핑커가 강조하는 1945년 이후의 ‘장기적 평화’ 시기의 그래프 역시 15, 16세기의 그래프를 웃돌고 있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3의 y축을 선형 스케일로 바꿔준 아래 그림4의 그래프는, 20세기의 분쟁 사망자 수가 15, 16세기에 비해 얼마나 높은 수준이었는지 현저히 보여준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2000년까지 최근의 300년의 분쟁 사망자 수를 한 축 위에 나타낸 아래 그림5의 그래프에서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그 이전 두 세기보다 높은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1945년 이후의 추세 역시 그 이전 200년에 비해 특별히 낮아 보이지도 않는다.
역시 그림5의 y축을 선형 스케일로 바꿔준 아래 그림6의 그래프에서는, 20세기가 그 이전 두 세기에 비해서도 전쟁으로 인한 사망의 빈도가 훨씬 높은 시대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기의 평화를 이끄는, 위 그래프들에서 보이지 않는 요인이 있을까? 위 그래프들의 골짜기 사이에 낀 휴식기와 1945년 이후의 분쟁의 감소세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면, 45년 이후의 추세는 민주주의의 확대와 함께 진행되었다는 것. 정치학에서는 ‘민주평화론’으로 알려져 있는 이론에 의하면, 민주주의 체제 사이에서는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낮다. 스티븐 핑커는 «계몽»에서 폴리티IV의 민주주의 지수를 이용해 계산한 ‘민주정 대 전제정’ 지수의 200년 간 시계열적 추이를 보여주며 세상이 점점 민주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낙관적인 전망을 전한다(313-314). 그럼, 1945년 이후의 ‘장기 평화’가 지난 몇백 년 간 전쟁의 증가세를 완전히 반전시킬 거라고 믿어도 될까?
물론, 200년 전에 비해 세상은 더 민주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항상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관계를 검토해보자. 첫째, 폴리티IV의 민주주의 점수는 과연 ‘민주주의’라는 구성개념에 대한 타당한 척도인가? 둘째, ‘민주정 대 전제정’ 지수는 과연 민주주의의 확산세를 나타내는 타당한 지표일까? 물론, 폴리티IV의 민주주의 점수는 많은 비교정치학 연구들에서 민주주의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자료이지만, 스티븐 핑커가 인용하는 맥락에 비추어 그 타당도가 적절한 지표인지는 검토가 필요하다. 예컨대, 폴리티IV 민주주의 점수가 과연 덧뺄셈이 가능한 등간 척도로 간주될 수 있는가? 폴리티IV의 민주주의 지수를 구성하고 있는 하위 항목들, 즉 행정부 견제의 정도, 정치참여의 개방성, 정치참여의 규제, 정치참여의 경쟁성, 선거의 경쟁성 등은 그 각각은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데에 이견이 있기 어렵지만, 문제는 각각의 하위 지표의 한 단위의 변화가 서로 다른 하위 지표의 같은 변화와 그 의미가 같은가 하는 점이다. 즉, 예컨대 ‘정치참여의 개방성’의 한 단위 증가가 ‘행정부 견제의 정도’의 한 단위 증가만큼 민주주의의 성숙에 동일한 기여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나치게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문제라고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문제는 같은 극단값을 가진 국가들 사이의 비교를 어렵게 만든다. 즉, 민주주의 점수가 완전한 독재 체제와 민주 체제 사이의 격차를 나타내는 데에는 좋은 지표일지 몰라도, 예컨대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의 비교에는 한계가 크다. 특히, 1800년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의 나라들이 민주화된 최근 몇십 년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에는 이런 문제가 크게 작용할 테다. 단적으로, 최근 ‘법과 정의당’의 집권으로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평가를 받는 폴란드의 폴리티IV 민주주의 점수는 10점 만점으로 미국, 프랑스, 한국보다도 더 높다. 역시 마찬가지로 극우 정권이 집권하며 민주주의가 크게 퇴행해 국제사회의 우려를 사고 있는 헝가리 역시 폴리티IV의 민주주의 점수에서는 만점을 받았다.
스티븐 핑커가 인용하고 있는 ‘민주정 대 전제정’ 점수가 가진 또다른 큰 문제점은, 50만 이상 인구의 모든 정치체들 한 단위의 점수를 동등하게 계산한 점이다. 한마디로, 핑커가 인용한 그래프의 논리대로라면, 14억 중국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과 8천만 이란이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똑같은 수준의 변화로 나타난다는 것. 반면, 민주주의 다양성(Varieties of Democracy; V-Dem) 연구소의 ‘자유민주주의’ 지수에 인구 가중치를 주어 한 나라의 민주주의 점수의 변화가 그 인구 수에 상응하는만큼 지수의 변화에 기여하도록 한 아래 그림7의 그래프에 따르면, 세계의 자유민주주의는 2000년대 이후 정체하다가 2010년대에 접어들어 1990년 즈음의 수준으로 회귀하고 있다. 스티븐 핑커의 ‘팩트’가 현상에 대한 잘못된 진단을 낳을 수 있는 극명한 사례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신낙관주의'는 '데이터'와 '팩트'에 충실하면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오염시킨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데이터와 팩트는 결코 스스로 말하는 법이 없다. '탈정치'를 지향하는 스티븐 핑커의 '신낙관주의'는 두 철학자의 비평처럼, "시작할 때부터 망한 프로젝트"다. 건강, '부(wealth)', 삶의 질, 행복, 불평등, 환경, 평화, 민주주의…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인류는 계속 '진보'해왔다는 스티븐 핑커의 '팩트'의 귀결은 이렇다: "우리가 지난 수십년 간 해온 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분명히 잘 기능하고 있고, 따라서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끌고 온 정치 경제 질서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Burkeman, 2017).” 스티븐 핑커에 의하면, 그 ‘정치 경제 질서’란 곧 ‘계몽’이 낳은 고전적 자유주의였다.
분명, 핑커의 주장대로 인류는 많은 측면에서 과거에 비해 진보했다. 하지만 매순간 모든 측면에서 진보만 하는 건 아니다. 지금 진행 중인 진보가 앞으로도 줄곧 전개될 지도 확신할 수만은 없다. 진보가 항상 일직선을 그려오지도 않았다. 스티븐 핑커는, 근거 없는 낙관론을 지지할 생각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인류가 지금까지 진보를 이루었다는 걸 알고, 지식과 이성을 통해 그 진보를 더 진척시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메세지라고 한다. 이런 그의 메세지에 기어코 반대해야 할 이유는 찾기 어렵다. 다만, 정말 ‘진보’를 추구한다면, 그래서 ‘진보’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결코 그의 스토리텔링에 의해 일관되게 매끄럽게 설명되지 않는 그 사실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더 예민해져야 한다. 계몽이 곧 고전적 자유주의는 아니며, 계몽의 진보가 곧 자유주의의 성취는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된다는 순진한 ‘신낙관주의’의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데이터도 그 스스로 혼자 말하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 상기시켜보자. 빈곤, 평화,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신낙관주의’가 주장하는 ‘팩트’에는 항상 신낙관주의자들의 해석의 층위가 있었다. ‘신낙관주의’의, 혹은 핑커의 기대와는 달리, 어떤 사실도 사람들의 이해관심 바깥에서 개체적·원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빈곤과 건강, 수명, 교육, 행복, 평화와 민주주의 등, 사회 지표들의 ‘진보’에 관심이 있다면, ‘신낙관주의’ 일각의 물신적 팩트주의가 질식시킨 사실관계의 함의를 복원하고, ‘신낙관주의’의 정치적 귀결을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곧, 사실관계에 기초한 합리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을 모색하는 진보적 실천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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