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도시에서 낯선 여정을 시작하다
오후 5시 30분 비행기. 출발 시간이 늦은 덕분에 오랜만에 여유로운 아침을 맞았다. 늦잠을 자고 천천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시며 짐을 다시 확인했다. 떠나는 날의 긴장감보다는 느긋한 기다림이 더 컸다. 아침 일찍 서둘러 공항으로 향하던 예전의 여행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시간 여유가 있는 만큼, ‘비행시간이 조금 더 이른 편이었다면 현지 도착도 일찍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장거리 비행은 늘 그렇다. 비행 내내 긴 시간을 날아 도착하면 어느새 하루는 저물어 있고, 여행지에서의 하루하루, 시간시간까지도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는 어떤 순간들을 만나게 될까. 어떤 이야기를 마음에 담아 돌아오게 될까. 출발 전에는 늘 물음표만 가득하다.
공항까지는 우버를 탈까 고민했지만, 시간도 넉넉하고 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스카이트레인으로 환승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했지만, 오히려 여행처럼 느껴지는 이 과정이 나쁘지 않았다. 밴쿠버에 살면서 대중교통을 이용한 건 이민 초기 몇 번뿐이었기에, 십여 년 만에 새롭게 대중교통을 경험하는 셈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사람들 틈에 서 있으니, 처음 이곳에 이민 왔을 때가 떠올랐다.
기상청 예보에는 오전 중 비 소식이 있었지만 다행히 날씨는 맑았다. 집을 나설 때 잠깐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지만, 곧 투명한 아침 햇살이 고개를 내밀었다. 전형적인 5월의 맑은 날씨. 푸른 하늘 아래 가벼운 마음으로 공항을 향했다.
버스를 타고, 스카이트레인을 갈아타 밴쿠버 시내 그랜빌 역에 도착했다. 한국처럼 목적지까지 연결되는 통로가 없어 전철에서 내려 5분가량 걸어 공항행 전철로 갈아타야 했다. 환승 전, 맥도널드에 들러 햄버거와 커피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스카이트레인을 타고 밴쿠버 국제공항(YVR)으로 향했다.
공항 전철을 타기 전, 밴쿠버 미술관 앞에서 조용히 나만의 여정을 시작해보았다. 미술관 앞 광장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엔, 설렘을 품은 나의 첫걸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분주한 도시 속에서도 이곳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공간이다. 따뜻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은 오후, 고즈넉한 건축물 앞에 서자 설렘과 기대가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밴쿠버 공항은 익숙하면서도 늘 다른 감정을 안겨주는 공간이다. 떠나는 이들의 기대, 돌아오는 이들의 안도, 여행의 설렘과 작별의 아쉬움이 뒤섞인 곳. 그 속에서 나 역시 또 하나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는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공항에서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고 했다. 예전에 나를 배웅하며 화장실에서 아이들 몰래 눈물을 삼키던 장소였다고 했다. 그때 나는 한국에, 아내는 아이들과 밴쿠버에 있었고, 우리는 8년이라는 긴 세월을 떨어져 살았다. 그 시절, 공항은 만남의 장소이자 이별의 장소였다. 지금 우리 부부는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점의 감정으로 공항을 다시 마주한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이제 본격적으로 비행을 준비한다. 9시간의 긴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후, 이스탄불행 비행기까지는 6시간의 대기 시간이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틈을 이용해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잠시 둘러볼 생각이다. 여행지의 풍경은, 그게 잠깐의 스침일지라도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런 찰나의 순간들을 담고 싶어 이번에도 경유지를 택했다.
이제 탑승이 시작되었다. 익숙한 도시 밴쿠버를 뒤로하고 낯선 도시로 향하는 이 길이, 또 어떤 이야기를 선물해 줄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