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축구관람을 담은 가족 이야기

카지노의 씁쓸함, 공원의 평화로움, 그리고 2만 5천 명의 축구장 열기

by 김종섭

​한국 시간보다 하루 늦은, 캐나다는 오늘이 추석 전날이다. 명절을 직접 쇠지는 않지만, 어릴 적 추억이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보름달은 국경에 관계없이 다만 시간차만 두고 같은 하늘 아래 둥근달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내는 성당을 가고 나는 아침 일찍 정성껏 김밥을 쌌다. 싸놓은 김밥 일부는 아침 식사 대용으로, 나머지 세 줄은 각각 한 줄씩 은박지에 싸서 아내, 아들과 함께 밴쿠버 시내로 향했다. 목적지는 BC 플레이스 스타디움(BC Place Stadium) 근처에 있는 JW 메리어트 파크 밴쿠버(JW Marriott Parq Vancouver) 호텔 주차장이었다. 이곳은 호텔, 카지노, 레스토랑 등을 갖춘 복합 시설이었고, 주차비가 저렴하다고 해서 주차를 위한 목적지였다.

잠시 호기심에 호텔 내 파크 카지노(Parq Casino)에 들렀다. 입구에서 신분증을 확인하던 직원은 능숙한 한국어로 "한국인 맞으시죠?" 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직원은 처음 온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며 10불씩 쓸 수 있는 이용권 세 장을 주었다. 직원은 왠지 모를 염려와 함께 "많이 게임하지 마시고 가세요"라고 당부했다. 회원가입 후 발급받은 카드로 30불의 이용권은 순식간에 소진되었고, 주머니에 있던 돈 일부마저 빠르게 사라졌다. 더 이상 하는 것은 승산이 없는 듯하여 카지노를 빠져나왔는데 입구에 있던 한국인 직원이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세요"라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씁쓸하긴 했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진심 어린 위로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곳에서 희망보다는 아쉬움을 안고 나간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JW 메리어트 파크 밴쿠버 내에 위치한 파크 카지노

김밥 소풍과 밴쿠버의 평화로움

호텔을 나와 5분 거리에 있는 쿠퍼스 파크(Coopers’ Park)라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넓지는 않지만 도심 속 강변 쉼터로서 독특한 매력이 있는 곳이다. 다리 아래쪽은 콘크리트 기둥 덕분에 비가 와도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잘 다듬어진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는 폴스 크릭(False Creek)을 따라 평화롭게 이어졌다.


눈앞에는 요트와 세일보트가 정박한 마리나(Marina)가 펼쳐졌고, 멀리 맞은편 예일타운(Yaletown)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수면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도시 풍경을 만들어냈다.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 유모차를 미는 부모들, 커피를 마시며 강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모습은 여유로운 밴쿠버의 일상을 느끼게 해 주었다.

쿠퍼스 파크에서 바라본 폴스 크릭 마리나. 요트들이 정박해 있고, 멀리 예일타운 고층 건물들이 보인다

공원길을 따라 걷다가 밴치에 앉아 싸 온 김밥을 펼쳤다. 소풍 나온 기분이 더해졌다. 아침에 집에서 먹었던 것과 같은 김밥인데도, 강을 바라보며 공원에서 먹으니 옛날 운동회나 소풍 때 먹던 김밥처럼 느껴지며 어린 시절 추억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김밥의 담백하고 익숙한 맛은 이국땅에서 명절을 앞두고 느끼는 향수를 달래주는 듯했다.

사실, 이곳에 온 주된 목적은 오후 3시에 있는 축구 경기 관람이었다. 음식물 반입 제한 때문에 김밥을 경기장에 가져가지 못할 것 같아 점심 대용으로 먹을 겸 시간도 많이 남아 있어 겸사겸사 공원을 찾은 것이었다.

밴쿠버 쿠퍼스 파크 벤치에 앉아 김밥을 먹는 모습. 소박하지만 추억이 더해진 점심 식사

뜨거운 밴쿠버 MLS 경기와 K리그의 온도 차이

김밥을 먹고 다시 공원 주변을 걷다가 BC 플레이스 스타디움으로 향했다. 경기장 앞에서는 작은 공연(콘서트)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그 옆 한쪽에서는 룰렛 게임 또는 '행운의 바퀴(Wheel of Fortune)' 같은 부스 게임을 통해 경품을 증정하는 다양한 이벤트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줄을 서서 참여했고, 아들과 나는 "VANCOUVER WHITECAPS" 문구가 새겨진 고무 팔찌를, 아내는 최고 경품인 스포츠용 수건을 받았다.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입장이 시작되어 지정된 좌석에 미리 앉았다.

이 경기장은 이영표 선수가 화이트캡스(Whitecaps)에서 뛸 때 와보고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때의 열광하던 순간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경기장 최상층은 개방하지 않고 하단층만 개방했는데도 관중석은 물 샐 틈 없이 가득 찼다. 공식 집계 관중수는 25,272명이었다. 오늘 경기는 북미 프로축구인 MLS(Major League Soccer)의 홈팀 밴쿠버 화이트캡스와 미국 산호세팀과의 경기였다.

MLS 경기 BC 플레이스 스타디움 내부. 관중석이 하단층 위주로 가득 차 열기가 느껴진다.

작년에 한국에서 K리그 경기를 자주 보러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다. 항상 아쉽고 안타까웠던 것은 스타디움에 빈 좌석이 많이 남는다는 점이었다. 한국은 축구가 인기 종목이고 국민 모두가 좋아하지만, 국가대항전 같은 큰 경기를 제외하면 프로 리그에 대한 관심도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많은 관중이 모인 이곳의 열기는 분명 한국 프로축구의 현실과는 온도 차가 있었다.

오늘 경기 관람석의 대부분은 캐네디언들이었다. 한인 사회 관중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밴쿠버에 살기에 응원할 팀은 있었지만, 사실 한국 경기만큼 뜨겁게 응원하지는 못했다. 한국에서는 응원하는 팀도 있었고, 특히 친분 있는 선수들이 뛰는 수원 삼성 경기를 열심히 다니며 응원했었다. 그때의 삼성 응원단이 보여주던 열광적인 응원은 관중 수가 적더라도 축구 경기 이상의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경기는 우리 팀의 4대 1 승리로 끝났다. 한국에서 축구 경기를 갈 때마다 응원팀의 우승을 자주 목격하지 못했던 아내는 오늘 경기가 우승으로 끝나 매우 의미 있는 관람이었다고 말했다.

캐나다의 축구장 입장료는 비싼 편이다. 최상급 좌석이 아닌데도 한 명당 100불(한화 약 10만 원) 정도이며, 물론 30불부터 시작하는 티켓도 있었다. 다행히 구단 측에서 초대권 2장을 받아, 아들과 함께 보려고 한 장을 추가로 구매했는데 옆 좌석이 남아 있어 우리 3 식구가 나란히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경기장 내에서는 맥주, 프라이드치킨, 팝콘 등을 판매하며, 음식물 반입 단속이 철저해서 매점을 이용해야 했다. 아들은 팝콘과 생맥주 두 잔, 음료 한 캔을 사 왔는데, 생맥주 한 잔에 15불(한화 약 1만 5천 원)로 한국 경기장 가격에 비해 다소 비싼 편이었다.

주차는 다행히 축구장 옆 호텔 주차장에서 7시간에 12불이라는 저렴한 곳을 찾아 주차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었다. 아들은 너무 저렴한 가격에 믿지 못하고 인터넷 결제까지 마친 상태인데도 현장에 와서도 직원에게 다시 확인을 받을 정도였다. 여행지에서 이런 예상치 못한 '꿀 정보'를 얻는 것도 작은 즐거움 중 하나이다.

BC 플레이스 스타디움 매점에서 구매한 생맥주와 팝콘. 캐나다 축구장 응원 문화의 상징적인 메뉴이다

​다시 헤어짐을 준비하며, 이민자의 추억을 만들다

아들과의 14일간 만남이 이제 내일로 끝난다. 14일이라는 시간이 참 짧게 느껴졌다.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특히 여러 경기장을 함께 다녔다.

내일 저녁 한국행 비행기로 아들은 다시 돌아간다. 이번 추석은 흔한 여행도, 성묘길도 아니었다. 아들의 캐나다 방문은 마치 어릴 적 추석이 되면 서울로 시집간 누나를 애타게 기다리던 마음과 겹쳐졌다. 타국에서 맞이하는 명절의 공허함 속에, 아들의 존재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추석 선물이자 의미였다. 아들이 오지 않았다면 이번 추석은 아마 무의미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이민자의 나라 캐나다에서, 우리는 오늘 소중하고 따뜻한 하루를 만났다. 이 밴쿠버의 하늘 아래서 만든 새로운 추억들은,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갈 아들의 뒷모습과 함께 가슴속에 오래도록 고스란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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