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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준비한 아내의 생일 선물

〈호두까기 인형〉과 김밥 네 줄이 남긴 하루의 기억

by 김종섭

일요일 휴일이었다. 눈이 와야 할 계절이지만 날씨는 끝내 비를 택했다. 오늘은 몇 주 전 며느리가 예매해 두었다는 〈호두까기 인형〉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이다. 아들과 나는 자연스럽게 빠지고, 시어머니인 아내와 며느리만 공연을 보기로 했다. 둘만의 시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아내의 생일은 12월 30일이다. 그동안 생일은 늘 성탄절과 함께 묶여 지나갔다. 연말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생일은 언제나 덤처럼 따라붙었다. 그래서였을까. 며느리는 이번만큼은 ‘아내의 생일 선물’이라며 생일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공연 티켓을 준비했다. 뜻밖에도 시아버지인 나까지 초대했지만, 나는 정중히 사양했다. 그날의 주인공은 아내였으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김밥 네 줄을 쌌다. 아내는 11시 반까지 아들 집에 차를 주차해 두고, 간단히 식사를 한 뒤 택시로 공연장에 갈 계획을 세워두었다. 며느리가 토마토 수프와 토스트를 준비해 둔다고 했지만, 함께 곁들일 음식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김밥을 싸기로 했다. 종종 김밥을 해 먹는 집이라 재료는 냉장고에 있었고, 아내가 집을 나설 때 김밥을 싸서 보냈다.

잠시 후 아내에게서 사진이 도착했다. 식탁 위에 놓인 토마토 수프와 샌드위치였다. 같이 김밥을 먹으라고 보낸 것인데, 사진 속에는 김밥이 보이지 않았다. 밥통에 네 줄 분량의 밥밖에 없어 전부 싸서 보낸 터였다. 세 사람이 한 줄로는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나는 라면으로 늦은 아침을 대신했다.

가기 전날 밤, 아내와 함께 유튜브로 공연 영상을 찾아봤다. 대사도 없고 자막도 없었다. 몸짓과 음악이 전부인 공연이었다. ‘이해는 못 해도 분위기만 느끼고 오자’는 마음으로 아내는 집을 나섰다.

공연장은 3층 구조였고 전 좌석이 만석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예약해 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가격이다. 아마 다른 부모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티켓 가격이 문득 궁금했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가격보다 성의가 먼저였다.

공연 시간은 오후 1시 30분. 여유 있게 도착했지만 객석은 금세 가득 찼고, 그 와중에 아들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다고 했다. 이런 순간을 보면 세상은 참 좁다. 만날 인연은 어디서든 만나게 되어 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며느리는 〈호두까기 인형〉의 줄거리를 정리해 카톡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대사도 해설도 없는 공연이었지만, 그 준비 덕분에 무대를 훨씬 편안하게 따라갈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발레나 클래식 음악에 익숙하지 않다. ‘봐도 잘 모르겠다’는 이유로 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런데 아내는 공연이 정말 재미있었다며, 장면 하나하나를 떠올리듯 이야기를 건넸다.


예전에 이탈리아 여행을 갔을 때, 아들이 오페라 극장에 가자고 한 적이 있다. 드레스 코드가 필요하다는 말에 와이셔츠까지 챙겨 입었던 기억이 있다. 아내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번에도 세미 정장을 갖춰 입고 갔지만, 공연장의 복장은 의외로 모두 자유로웠다고 한다.


〈호두까기 인형〉의 원작은 캐나다가 아니다.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음악이고, 원작 동화 역시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공연은 캐나다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민자의 나라 캐나다에서, 연말을 앞두고, 아내의 생일 선물로 만난 무대였다. 그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가보지 못한 곳, 해보지 못한 경험이 참 많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한 번도 가지 못하고 지나치는 장소들도 많다. 다음에 어떤 장르든 기회가 생긴다면, 오늘 아내가 본 발레 공연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 보고 싶다.

저녁이 되어 김밥 사진과 아들이 만든 떡볶이 사진이 며느리에게서 도착했다. “아버님, 김밥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들 내외는 그 김밥을 저녁 식사로 먹었다고 했다. 그날의 기억은, 그렇게 조용히 잘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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