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인 에어" (1996. 1. 20. 개봉)
감독 : 프랑코 제피렐리
배우 : 윌리엄 허트(로체스터), 샬롯 갱스부르(제인), 조안 플로라이트(페어팩스), 안나 파킨(어린 제인)
* 1997. 1. 12. (일) 5:00 PM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은 시종일관 원작과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손필드의 모습이라던가, 로체스터씨의 외모와 성격, 잉그램 양의 모습 등등...
상당히 많은 부분 원작의 묘사에 충실하려 한 노력이 보인다.
특히 제인 에어 역으로 샬롯 갱스부르를 택한 데에 대해서는 무한한 찬사를 보낸다.
못생긴 것 같으면서도, 어느 때는 꽤 미인처럼 보이고, 무뚝뚝하면서도 눈이 맑고 침착한, 똑똑한 이미지.
다른 이에 비해 좀 돌출된 듯한 아래턱이 다소 신경쓰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인 에어의 분위기에 딱 맞다.
로체스터 역의 윌리엄 허트는 연기로서 로체스터의 괴팍한 성격을 표현하는 데는 많은 신경을 썼으나,
우선 머리가 노란 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였으면...
또 골격이 더... 그러니까 얼굴이 좀 각지게 생긴 강인한 모습이었으면 더 그럴 듯 했을 텐데.
이번 로체스터씨는 강함이 어느 정도 배제되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가진 창백해 보이는 남자로만 그려진 것 같다. 사실 로체스터씨는 키도 작은 편이라고 묘사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인 에어랑 비슷하거나 더 작아버린다면, 그건 그림이 너무 안 좋을 것 같아서 싫다.
아빠는 손필드의 풍경이 과거 고성들의 모습, 초상화 그대로라며, 어둠 속에서 얼굴이 반만 보이는 모습 그 자체가 다 하나의 초상화, 그림 자체라면서 촬영 솜씨를 극구 칭찬하셨다.
영화를 다 본 후의 내 감상은... 역시 영화는 '제인 에어' 같은 대작을 그 나름의 완결성으로 완성시키기엔 역부족임을 깨달았다. 비록 아직 번역본을 읽고 있긴 하지만 '제인 에어'의 매력, 묘미라면, 제인의 독백으로 풀려나오는 그녀의 미묘한 감정과 심리 상태의 변화, 그리고 로체스터와 제인의 선문답 같은 깊이있는 대화에 있는 것인데, 영화는 줄거리만 잇기에도 급급해서 그 점엔 신경을 못 쓴 것 같다. 그래서 영화는 끝으로 갈수록 불 나고, 유산 받고, 돌아와 결혼하는 과정이더욱 시시하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 영화도 역시 뒷심이 부족했다고나 할까?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흠... 침대에 불난 다음, 달빛 비치는 방에서 로체스터가 잠옷 바람에 머리를 풀은 제인의 손을 잡으며 "그대가 나를 도울 줄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지..." 하는 부분. 캬아~~~! 그리고 계단에서 왜 우울한 거냐고 계속 추궁하는 부분도 좋다.
아무튼 다시 생각해도 후반부가 너무 밍밍하다. 원작의 그 미묘한 심리가 안 살아나서 심심하다.
역시 원작이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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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0월 3일 (일) 오전 11시, 집에서, 혼자
1996년에 개봉한 샬롯 갱스부르 주연의 "제인 에어"를 다시 보았다.
샬롯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는 내가 영문학 전공을 하던 학부 시절 가장 좋아했던 책이었다.
지금도 그때 읽었던 signet classic 문고판 책을 보관하고 있을 정도다.
그 당시 나에게는 우습게도 'master' 판타지 같은 것이 있어서,
그 집의 master, 혹은 그 분야의 master에게 인정받고, 더 나아가 사랑받는 그런 이야기들에 한없이 끌리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부끄럽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랬기 때문에, 나는 제인이 로체스터씨와 행복한 결론을 맺는 것이 참 좋았더랬다.
물론 지금은 이게 로체스터씨한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론이겠지만,
과연 제인에게도 좋은 결론일까 하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다. 쩝.
암튼 이번에 진짜 오랜만에 다시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의외로 제인 에어나 로체스터씨에 관한 게 아니었다.
제인이 어린 시절을 보낸 로우드 학교의 템플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로우드 학교는 비뚤어진 기독교식 교육을 시키는,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곳이었는데,
템플 선생님은 거기서 제인 에어의 유일한 친구이자 빛이 되어준다.
비단 제인 에어뿐만 아니라, 거기서 고통 받는 모든 여자 아이들의 유일한 숨구멍이 되어준다.
로우드 학교의 부조리한 시스템은 거기서 교육받는 여자 아이들에게만이 아니라,
템플 선생에게도 무척 고통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템플 선생은 거기에 계속 남아있는 것이 자기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도, 숨구멍이 되어줄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견딜 수 있다.
템플 선생은 스스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거기에 있는 아이들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가 되었다.
어떻게든 아이들을 잘 성장시켜 더 나은 환경으로 떠나보내는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곳을 거부하고 떠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 안에서 제 정신과 올바른 가치를 유지하면서 버텨내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제인 에어를 제인 에어답게 끝까지 지켜준 것은 템플 선생이었다.
그녀가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제인도 좋은 교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암튼 '제인 에어'는 남녀 주인공이 둘 다 역대급으로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존재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소위 '사교적'이라고 표현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여러 가면들을 쓰지 못하는,
상처가 많지만 솔직한 사람들의 사랑 찾기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로체스터가 제인을 정말 사랑했다면, 결혼식 전에 자신의 비밀을 밝히고,
제인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체스터는 끝내 비겁했고, 끝내 숨기려 했고, 결국 버사와 제인, 두 여인 모두에게 상처를 주었다.
이런 로체스터의 무신경함이 내가 둘의 결혼에 박수를 쳐줄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