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어찌된 애가 화장실만 수도원 같니?”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온 엄마가 침실에 딸린 화장실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내 마음에 출가 못한 수녀님이 계셔.”라고 농을 쳤다. 떨어져 산지 20년이 다 되어가는데 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화장실을 번뇌가 사라지는 해우소(解憂所) 처럼 사용하는 것을 말이다. 나는 덧셈에만 능한 잡동사니의 후예다. 집에 빈 벽이 있으면 종이라도 한장 붙여놔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내추럴 본 맥시멀리스트인 것이다. 부엌 싱크대는 각기 다른 명도를 띄는 올리브색 타일을 두르고, 침실 벽엔 60년대 이탈리아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 정신 사나운 원숭이 무늬 벽지를 붙였지만, 침실 옆 화장실은 엄마 말마따나 독신자의 수도원같다. 집을 고치며 다른 곳들에 힘을 쏟고나니 화장실 고칠 돈이 부족했던 탓이다. 아무리 사이좋은 부부라도 이 화장실을 같이 쓸 순 없다. 사람 한 명이 서 있으면 가득찰 정도로 좁아서 슬리퍼를 신을수도 없다. 미묘하게 작은 사이즈의 변기와 아담하지만 각진 세면대, 서거나 앉는 것 외엔 어떠한 행동도 불가한 샤워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것이 최소한으로 들어간 이 화장실에 거울만 큰 것도 이상한 일이다. 얼굴과 몸을 반밖에 볼 수 없는 직사각형의 작은 거울을 붙여 놓는 것으로 화장실 인테리어를 마무리했다.
“여긴 나만 쓰는 화장실로 할거야.” 욕조가 있는 거실 화장실은 남편과 아들 전용으로 정해준 뒤의 일이다. 그들은 침실 옆 작은 화장실 따위 딱히 탐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주인없는 땅은 깃발을 먼저 꽂는 사람이 임자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자 의욕이 생겼다. 먼저 침실 옆 화장실의 전용으로 쓸 3겹 소창수건으로 따로 준비했다. 수납장을 설치할 자리가 없어서 화장실에 들어갈 때 마다 새 수건을 들고 들어가야 했지만 예상보다 쾌적했다. 왜 그동안 환기도 안되는 눅눅한 화장실에 수건을 두었는지 탄성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세면대엔 다용도로 쓸 수 있을 비누 하나만 두었다. 발리 여행에서 주워왔던 화산석 하나를 받침대 삼아 깔아두니 비눗물이 잘 빠지고 보기에도 좋았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한다더니 물건 없는 작은 화장실은 청소도 쉬웠다. 샤워가 끝나면 스퀴지로 거울과 유리를 쓱 훑고,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따뜻한 손바닥으로 세면대를 닦는다. 몸을 닦고 남은 수건으로는 샤워기의 수전도 닦을 수 있다. 발로 바닥을 훔치고 머리카락 등을 정리하면 2분 안에 청소 완료다.
남편은 침실 옆 화장실의 한결같은 쾌적함에 대해 의문을 표하곤 했다. 집의 모든 곳이 엉망진창인 순간에도 내 전용 화장실만큼은 청결함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기에 더 의아해 하는 것 같다. 침실에 딸린 화장실은 손님에게 보여줄 일이 없는 공간인데도 말이다. 남편에게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침실 옆 화장실은 내 마음 속 최후의 보루다. 정리하지 못한 집의 다른 공간들이 있더라도 내 화장실에 들어선 순간만큼은 ‘내가 좀 깨끗하지. 난 언제든 깔끔할 수 있는 사람이야’하는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다. 샤워를 하고 2분 동안 날쌔게 청소를 마치면 신기하게도 기운이 난다. 처음엔 청소 도구들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맨손으로 세면대며 컵을 닦는 일도 많다. 번뇌가 사라지는 해우소(解憂所) 처럼 느껴서일까. 이사온 뒤 좀처럼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십자가상은 거실이나 침실이 아니라 내 화장실에 두는 것이 적당할런지도 모른다. 내가 느끼는 진정한 고해의 순간은 손을 뻗을 수도 없는 샤워부스에 서서 이마로 코로 입으로 정신없이 쏟아지는 물의 세례를 받고 있을 때다. 반성,참회,감사의 말들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이다. 화가 많이 났다가 가라앉기도 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다가도 감사하기도 하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는 날에도 ‘최후의 보루’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면 확실하게 나아진다. 15분만에 기분을 바꿀 수 있는 매직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 작은 화장실에서 멀멀한 벽을 바주보고 하는 따뜻한 물 샤워일 것이다. 화장실 밖에선 여전히 수많은 물건들을 끌어안고 사는 잡동사니의 후예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게는 최후의 보루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