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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쌤 Jun 01. 2023

부끄러움과 뻔뻔함 사이에서

가끔은 철학자가 됩니다(20)

내가 이 글을 쓰는(혹은 쓴)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부끄럽다는 사실을 안다는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이, 자신의 부끄러운 말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기는 싫다. 떳떳하게 부끄럽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부끄럽다는 말에는 이미 떳떳하지 못하다는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나역시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운 행동을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게 또 부끄럽다. 삶은 부끄러움과 뻔뻔함 사이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택할 것 같다. 아직까지는 그게 내 양심이다. 뻔뻔하게 살려고 하는데도 자꾸만 부끄러워진다. 어쩌면 부끄러움과 뻔뻔함은 내가 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내 행동과 태도는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더 뻔뻔해지거나 더 부끄러워질 수는 없을 것 같다.

뻔뻔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라고 말해야 할까. 뻔뻔한 사람들은 이미 뻔뻔할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부끄러움을 느끼라고 말해도 뻔뻔한 태도를 지속할 게 뻔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태도를 참고, 인내하자니 너무 화가 난다. 화가 나면 날수록 뻔뻔한 사람이 밉고, 뻔뻔함 자체가 혐오스럽다. 결국 뻔뻔한 사람과 더는 가까이 지내지 않고 멀어진다. 관계는 돌이킬 수 없고, 뻔뻔한 사람은 계속 뻔뻔하기 때문에 왜 둘의 사이가 멀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양쪽 모두 서로를 혐오한다. 친구라는 관계가 끝나고, 가족이라는 관계가 끝난다. 대화가 사라지고, 만남이 사라지면서 둘의 연결선은 끊어진다. 연결선이 끊어지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득 떠오를 때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기억조차 끊어버리고 싶어진다. 뻔뻔한 사람의 최후는 결국 혼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 반대로 부끄러워하는 사람에게 뻔뻔해지라고 말해야 할까. 이 세상은 뻔뻔한 사람들이 이끌어간다. 거짓말을 해 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어도 본 체 만 체 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남의 것을 빼앗아 오기도 한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나 대기업들은 온갖 숫자와 법을 통해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이 원하는 걸 얻는다. 그러니 우리는 뻔뻔해져야 한다. 이 세상에서 더 나은 환경과 여건으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아, 뻔뻔해져라. 그래야 당신은 손해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야 더 많이 가질 수 있다. 친구 하나 잃는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친구 하나를 잃는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안다. 부끄러움은 고통이다. 통증이다. 부끄럽기 때문에 아픔이 느껴진다. 뻔뻔해지면 질수록 통증은 강해진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의 최후는 끝없는 고통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뻔뻔한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이 되어간다. 나는 무엇이 더 좋은 세상인지, 어떤 사람들로 가득찬 세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이렇고, 저런 기준으로 보면 저렇다. 결국 세상의 모든 기준은 내가 정해 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이 그 기준을 정해버린다. 나는 세상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내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다만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하는지 아직도 헷갈리고 있다는 게 문제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 자체가 다행스러운 것처럼 나만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직도 헷갈리고 있다는 게 참 다행스럽다. 하루하루를 쉽게 쉽게, 대충 대충, 그럭저럭 타협하며 살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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