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철학자가 됩니다(4)
우리에게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이 주어졌던 아주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자. 작디작은 스케치북은 순식간에 여백을 잃었고, 완벽하다고 생각된 우리는 스케치북의 다음 페이지를 채웠다. 고작 삼십 분만에 스케치북은 가득 채워졌고, 어머니는 그런 우리에게 종이 아깝게 낙서나 했다고 핀잔을 했다. 그 핀잔 앞에서도 우리는 흰 벽을 향해 색을 덧칠할 욕망을 생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 버렸다. 흰 벽지에 우리들의 가족과 자동차와 집이 그려졌다. 완벽한 그림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그림 안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흐릿하게나마 새겨져 있었던 게 아닐까. 결국 우리는 호되게 혼났고, 행복은 새로운 벽지 뒤로 사라졌다. 마치 우리 가족의 행복이 장막 너머로 몸을 숨긴 것처럼.
작디작은 스케치북에 너의 생각을 담아내라고, 쏟아내라고, 한다. 하지만 아껴야 하니 이건 무척이나 갑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해소와 해방을 거세당한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너무 많은 제약들에 순응하며 살았고, 나름대로 거부하거나 반항해보고, 항거해 보았지만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우리는 결국 무엇을 폭발시켜야 하는지도 모르는 세대가 되었다. 누군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폭발하거나, 사회에서 제어해 놓은 시한폭탄의 시간에 맞추어 폭발하고 있다. 우리는 그 폭발의 의미도 알지 못하고, 폭발 후 우리 스스로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도대체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지만 그것은 중요치 않다. 이제 와서 그걸 안다고 무엇이 바뀔까. 잘못된 지점에 대한 부정까지 우리에게 내재되어있다면 어쩔 텐가.
젊음의 해방구 혹은 젊음의 분출지, 나아가 탈출구라고 만들어놓은 홍대를 생각해보자. 사회와 기성세대, 매체들이 만들어 놓은 그곳은 진짜 해방구로서의 역할에는 관심이 없다. 그곳은 쾌락과 원초적 욕망과 상업적 이윤이 존재한다. 삶의 문제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의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마치 그곳을 해방구로 믿으며 "놀자"라고 하지만, 그 것은 미친 초자아의 명령일 뿐이다. 놀자, 라는 말 앞에 항상 어떤 지시와 명령, 조건이 붙는다. (좋은 학점과 스펙을 위해 힘썼다면) 수고했으니, "놀자" 그렇지만, (만약 그렇게 노력하지 않았다면 맘 놓고 놀 수 없다). 이것은 스케치북을 주며 "니 맘대로 그려 봐"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종이를 낭비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포스럽거나 나이에 맞지 않는 야한 그림 따위는 그려선 안 되고... 등등.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한다. 메시지를 보내는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벽에 페인트 스프레이를 뿌리는 그라피티를 생각해 보자.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다. 그저 색칠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안달 난 존재가 아니다. 예술의 본질적 태도는 '메시지 전달'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메이저이든 마이너이든 중요치 않다.
삶의 방식은 자신이 만들어내야 한다. 문제의 출발점을 찾아내려는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살아가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냐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