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I 박하림 Sep 03. 2020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예전에 유럽 여행 중이던 친구가 내게 엽서를 보내고 싶다며 주소를 알려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알려주었고, 몇 주 후 두툼한 봉투가 내 앞으로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서로 조심조심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을 뿐이고, 시간을 나눈 기억이라고는 그런 대화 몇 번이 전부였는데, 엽서 대신 편지가 도착해서 놀랐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 예상했던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메세지에 주소를 적어 보내며 나도 모르게 ‘왠지 엽서 이상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문득 했었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편지를 읽으며 어쩌면 이렇게 두툼한 편지를 받게 된 것이 당연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수년 전 심어놓은 묘목이 무력무럭 자라 하늘을 향해 이파리들을 피워 보내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친밀해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강하게 서로에 대해 교감하는 면이 있었거든요. 나도, 그 친구도 우리는 서로의 신변잡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서로의 영혼은 잘 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에 그런 관계가 어떻게 가능하겠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있더라고요.


그 이후로는 연락이 이어지지 않아 아직까지는 왕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여전히 그 친구를 떠올릴 때면 문득문득 ‘언제 한 번 보겠는데’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내가 ‘인연’이라는, 아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을 여전히 신뢰하는 것도 아마 이런 이상한 기분 때문일 거에요.



당신의 편지를 잘 받아보았습니다. 나는 단지 물건 몇 가지를 부탁했을 뿐이지만, 저 친구에 대해 느꼈던 것처럼 왠지 어떤 형태로든 편지를 받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편지가 반드시 글로 쓰여져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음악가는 음악으로, 목수는 목공으로, 화가는 그림으로, 가수는 노래로 편지를 띄울 겁니다. 당신은 가장 당신다운 모양의 편지를 띄워준 것 같아요.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이해하려면 오랜 시간 곱씹어야 하겠지만, 내 삶에는 어차피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고 내면을 들여다 보는 것 이상의 낙은 없으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애초에 당신에게 글로 된 편지를 쓰려고 물건을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새롭지는 않겠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각별한 방법이었습니다. 첫눈이 오는 날 우체국에 가서 부칠 생각인데, 내 충동이 어디로 나를 이끌지는 모르는 일이죠. 첫눈을 기다리는 것도 좀 진부하지만, 늘 누군가에게 느닷없이 편지를 써서 줘버리는 내 즉흥성을 생각하면 적어도 내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 첫눈이 늦을수록 여러 통을 보내게 될 것 같아요. 만약 올해 눈이 단 한 번도 내리지 않으면 어떡할까, 이런 저런 망상에도 빠져봅니다.



요즘 나는 나도 모를 어떤 곳에 이끌려 가듯 살고 있습니다. 그 모를 곳 중 가장 커다란 의미를 갖는 곳이 당신입니다.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잘 모릅니다. 사랑인지, 우정인지, 외로움인지, 연민인지, 존경인지. 그런데 그 의미를 명확히 알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 것도 처음입니다. 내일 내가 무엇을 할지는 모르지만 아마 내 충동이 이끄는 곳에 서있으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내 마음이 등을 떠미는 방향으로 걸음을 떼고 있겠죠.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면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될 겁니다. 그곳에서 불행해질 수도 있고, 눈물을 쏟을 수도 있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그 한 번이 우리의 전부일수도 있겠지만, 그조차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저 도달하고 싶고, 알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도 성격이 급한 내가 무엇하나 서두르지 않는 건, 앞서 언급한 친구에 대해 내가 갖는 은근한 확신 비슷한 걸 당신에 대해서도 느끼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나는 그곳에 도달할 것이고, 아무리 늑장을 부려도 너무 늦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깊은 기암괴석에서 솟아난 물이 결국 바다에 닿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도 그렇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올지언정 결국 우리는 바다를 향하기에, 당장 서로 닿지 못할 물줄기라고 슬퍼하거나 미안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슬퍼하지도, 미안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누군가의 의지에 달리고 책임을 묻는 일이 아니니까요.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나는 조금 울었습니다. 슬픔도 고통도 아니고, 열쇠가 열쇠구멍에 탁 맞아 떨어질 때의 후련함에서 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내게 주는 의미와는 달리, 나는 당신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도 있죠. 슬프겠지만 그조차도 괜찮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 대로, 나는 나대로, 지금의 본연의 모습 그대로 제 길을 따라 흘러 흘러 가기를 바랍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낳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