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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Sep 03. 2020

이낳괴

이기적이지 못해서 생기는 괴로움, 아쉬운 소리를 ‘하는’ 능력



얼마 전 친구가 만난지 몇 달 안 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털어놓아 깜짝 놀랐습니다. 본인도 어쩜 그렇게 취향이나 가치관이 잘 맞는지 모르겠다며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었고, 제가 보기에도 둘이 정말 잘 어울렸거든요. 그런데 내막을 들어보니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해가 갔고,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편안하고 지속가능한 연애에는 서로 대화가 잘 통하는 것 외에도 꼭 필요한 한 가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이기적인 솔직함입니다.


그 남자분은 책임감이 극단적으로 강하고 스스로에 대한 기준도 겉으로 보여지는 것 이상으로 높은 사람이었나 봅니다. 사실 나야 말로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늘 천장도 뚫을 기세라 남자분의 내적 갈등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감히 질러보자면, 어쩌면 연인이었던 내 친구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들어보니 이별의 직접적인 사유는 남자분에게 연애라는 관계가 너무 버겁다는 것이었습니다. 커리어를 적극적으로 끌고 가야 하는 상황에서 연애까지 한다는 게 여러모로 지치고 부담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내 친구는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서 가장 쿨하면 쿨했지 징징대는 성격은 전혀 아닌데도 말이에요. (그랬다면 아마 나와 친구가 되지 못했겠죠. 나는 나만 징징댈 수 있는 내로남불형 이기주의자니까요.)  하지만 이별의 진짜 사유는 남자분의 강박적인 배려에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수준의 배려를 타인에 베풀도록 스스로를 쥐어짰던 것이죠. 그리고 그런 관계맺기가 패턴화된 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아마 가족구성원들 중 비슷한성향을 지닌 분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거나, 타인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어려워하는 자존심 때문이거나, 그 둘의 결합 때문일 것 같았습니다.



사실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혹은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에게 처음부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성향보다는 능력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애초에 배려와 책임감은 개나 줘서 소시오패스에 가까운 이기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당신이 아무리 이걸 원한대도 내가 그건 못해줘’, ‘나는 당신을 참 좋아하지만 이건 지켜줘야 해’라고 선을 긋는 건 훈련이 필요한 스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단 나부터가 그런 능력치가 전무한 상태에서 조금씩 끌어올리고 있거든요. 충동적으로 관계를 가져갔다가 맞춰줄 수 없는 점이 있으면 충동적으로 관계를 끊고, 짜증이 나거나 서운하거나 마음에 안 들어도 혼자 삭히다가 폭발해서 잘라버리길 반복하던 어느날 현타가 왔습니다. 아니 내가 도대체 뭐라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서 잠수를 탔지, 그게 어떻게 배려를 하는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이지. 그래서 이후로 잠수를 타버리고 싶은 충동이 치밀 때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가 먼저 숨지는 말자, 그게 저 사람을 위하는 길이다’라고 되뇌이며 참았습니다. 나 따위가 옆에 붙어 있는 게 어떻게 저 사람을 위하는 길이냐고 마음 속 자괴감이 속삭였지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런 모든 소리를 깔아 뭉개며 오직 관계의 지속성만을 맹목적으로, 조금 병적일 정도로 쫓아 거절하고 요구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바보 같고 미련할 정도로, 내가 맞출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정교하게 갈라내려고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그렇게 폭풍우가 몰아치고, 조금씩 구름 너머로 실버라이닝이 비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렇게 미련할 정도로 서툴고 고집스러운 나와 함께 해준 소중한 사람을 만난 건 너무나도 큰 행운이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저런 노력이 사치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요. 그래서 나는 내 삶의 골목에서 마주친 누군가가 나와 똑같이 미련하고 서툴다면, 그의 아쉬운 소리를 들어주는 그릇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물론 나는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나도 내 아쉬운 소리를 할 겁니다. 나는 그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것이지 그들의 상담사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들도 내 상담사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고, 나 역시 그걸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내 아쉬운 소리를 그들이 해결해야 할 이유도, 그들의 아쉬운 소리를 내가 해결해줘야 할 이유도 없는 겁니다.


사람이라면 마음 속에 징그러운 괴물 한두 마리는 키우게 마련인데 뭘 안 그런 척을 하고 살아요? 각자의 반려동물들을 서로에게 소개해주는 것처럼 각저 내면의 괴물들이 지랄을 할 때에는 같이 경악하고 욕도 씨부리면서 돈독한 관계맺기가 가능한 것 아닌가요.


이렇게 센 척을 해도 나는 아직도 내 괴물들이 용트름을

하면 먼저 기겁부터 하고 봅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그런 찌질한 모습을 그냥 침 흘리듯이 질질 흘리고 다닙니다. 내가 침흘리개인데 어떡하겠어요. 이불킥 좀 한다고 뒤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불킥 해야죠.



그래서 내 친구의 구남친이 머지 않은 미래에 같이 침 흘리개가 되어줄 연인이나 친구를 만나길 바라봅니다. 아 물론 내 친구도요.



영화 <세상의 끝까지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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