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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Sep 02. 2020

연낳괴

연애사가 낳은 괴물





당신은 내가 다섯 번째 만나는 남자라고 말했을 때, 당신은 그 기준이 뭐냐고 되물었죠. 그리고 나는 다시 되물었습니다. 그 기준이 내게는 일관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게 어떤 의미가 있겠냐고. 어떤 남자랑은 손만 간신히 잡았을 뿐인데 긴 여운이 남기도 했고, 어떤 남자랑은 몸을 여러 번 섞었는데도 영 마음에 어떤 느낌도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 손만 잡은 남자와 몸을 섞은 남자도 내가 만난 남자들에 속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운이 남는 남자라고 다 포함시킨 것도 아니고, 마음이 가지 않았다고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하필 다섯 명이냐. 그건 나도 잘 몰라요. 사실은 그냥 숫자 하나를 골랐을 뿐이에요. 내가 만났다고 말하는 남자들 중에는 사실 날 만나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어요. 분명히 본인은 나랑 사귀었다고 기억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겠죠.



이런 얘기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가 불러올 파장과 오해에 비해 그 이야기가 내게 같는 중요성이 그렇게 크지 않았거든요. 아마 누군가는 연애를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거짓말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문란했던 과거를 숨기려고 거짓말하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나는 내가 연애를 몇 번 했는지, 과거에 문란했는지 조신했는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그래서 누군가 나를 떠보려고 들면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숫자를 말해요. 떠본다는 건 가치평가를 내리기 위해 보이지 않게 활시위를 겨누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차라리 궁금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으면, 가령 지금까지 섹스를 한 남자가 몇 명이었냐고 물으면 사실대로 대답할 텐데. 활시위를 이미 당겨놓고 빙빙 돌려 묻는 건 우습게 느껴져요. 두루뭉실한 질문으로 내 생각과 행실을 낚아 올리려고 계산하는 표정이 애잔하다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남자는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여자는 생각도 못한 것까지 의심한다고. 그게 남자-여자로 나뉘는 특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여자고 말하지 않은 많은 것들에 대해 촉각이 곤두서는 사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전형적인 여자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죠. 전형적인 여자인 내가 연애에 관해 도달한 소중한 결론이 있다면, 이런 겁니다. 당신이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나는 촉각을 곤두세우겠지만, 그것들을 당신이 직접 말하지 않는 한 나는 그것들을 내게 좋은 방향으로만 이용할 거에요. 직접 묻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직접 답하지 않을 것이고, 직접 부탁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알아서 들어주는 일은 없을 겁니다. 직접 화내지 않는 일에 대해 알아서 기는 일도 없을 거고요. 물론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지 않더라도 나를 사랑할 거라고 믿기는 할 거에요. 그게 나한테 이로우니까요.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사랑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쿨할 수 있느냐고, 쿨한 척 하는 것이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이거나, 둘 중 하나 아니겠냐는 내 친구의 의구심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당신보다는 나를 더 사랑할 뿐입니다. 당신이 내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사랑을 퍼부어 달라고, 간절한 만큼 솔직하게 직접 부탁한다면 나는 성심껏 그 부탁을 들어줄거에요.하지만 그런 바람을 품고만 있을 뿐이라면, 나는 그 바람에 대해 알고 있더라도, 딱 내가 주고 싶은 만큼만 줄 겁니다.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기대하는 바입니다. 나의 연애사를 상징하는 몇 가지 숫자보다, 그 연애사를 거쳐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궁금해 하길 바랍니다. 물론 여전히 다른 게 궁금할 수도 있죠. 궁금해 한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싫어하게 되거나 실망하게 될 일은 없을 거에요. 다만 내게 직접 묻지 않고도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얻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게 내가 연애사를 통해, 연인에 대해 지켜야 하는 예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깨달은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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