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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Sep 02. 2020

나닮괴

날 닮은 사람은 위험해








20대 끝물이 들어 가장 만족스러운 건 더 이상 인간관계에서 가슴 아픈 시행착오를 겪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입니다. 물론 앞으로도 가슴은 아프겠죠. 하지만 웬만한 아픔은 대강의 내용을 미리 알고 겪게 될 것 같다는 점에서 ‘시행착오’는 아닐 것 같아요. 한마디로 눈떠보니 이별, 눈떠보니 피해자, 눈떠보니 가해자가 되어 있는 상황이 대폭 줄고, 내가 이별을 할지 피해자가 될지 가해자가 될지를 자의로 선택할 수 있게 되어 갑니다. 오만한 발언일까요? (원래 어릴수록 오만한 법이라며 배 째라는 태도 하하)


그런데 인간관계에 노련해지는 만큼 지루해지기도 쉬운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을 각각 내 마음으로부터 어느 지점에 위치시킬지 미리 정해놓고 움직인다는 건 예측불가능한 변수가 나타내 마음을 푹 찌르고 지나갈 일이 거의 없다는 말이니까요.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나는 주변 사람들의 물에 흠뻑 젖는 성향이 있어 관계가 단조로울수록 생각과 감정이 지루해지는 편입니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지루함이라고도 하죠. 그래서 재기불가의 상처는 피하되 매너리즘에는 빠지지 않는 관계맺기의 방법을 모색하는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어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 재기불가의 상처를 피하기란 지금의 내게는 불가능한 것 같아요. 나와 닮은 사람일수록 그의 내면의 역동성을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예술작품처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꽉 차죠. 또 나와 꼭 닮을 수는 있어도 꼭 같을 수는 없으니까, 너와 나의 내면의 분기점에 서서 서로를 관찰하는 긴장감도 짜릿합니다. 매너리즘 같은 건 멍멍이나 줘버린 시간들이 흘러가죠.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날카로운 말들로 서로를 찌르기 시작하는 법. 문제는 나를 꼭 닮은 그가 내게 찔리면, 그동안 그를 너무나 섬세하게 느껴왔던 만큼 그 고통까지도 싱크가 되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그가 나를 찔러야 할 때, 그 역시 그럴 개연성이 높겠죠. 우리는 두 배 빨리 상처범벅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딱지뒤범벅이 되게 전에 그 같은 비극을 막으려 시도해볼 수는 있겠죠. 물리적 한계를 두고 일정 선 이상 가까워지는 걸 방지한다든가, 일정 수준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든가. 문제는 닮은 사람끼리는 서로에게 일정 선 이상 다가가지 않으려는 상대방의 망설임까지도 투명하게 통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서로 상처 받지 않기 위한 협업이 상처가 되고마는 말장난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끔찍하죠.



나는 아직 모르겠어요. 날 닮은 사람을 보면 외로움이란 가뭄에서 박하를 띄운 오아시스라도 만난 듯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눈물을 따라서 쭉 가버리면 그 끝에 이번에는 어떤 보스몹이 있어서 재기불능이 되어버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이제는 늘 망설입니다. 날 닮은 사람은 울컥 한 번 하고 지나쳐 보내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어차피 그런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울컥할 일도 몇 번 없겠죠. 가무는 생활도 나쁘지만은 않기도 해요. 선인장 꽃처럼 피어난, 아기자기하고 야들야들한 사랑을 보살피며 살아가는 것도

갈증과 친근하게 지내며 상부상조하는 것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가끔씩은 왜 이렇게 인생이 길까, 묻게 됩니다. 남은 삶의 반 정도를 날 닮은 사람들과 피비린내 나는 미친 전쟁을 치르고 장렬히 전사해 영영 되살아나지 못한 채 맞이하는 죽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반 아이더가 기적을 찾아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린, 그의 마지막 작품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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