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RI 박하림 Sep 02. 2020

에바 헤세의 다이어리

그녀는 나의 변비약






우울할  종종 에바 헤세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들이 보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저는 드로잉을 보는  좋아해요. 소설가들의  중에서도 에세이에 천착하는 청개구리 같은 심보가 작가들에 대해서도 발동하는  같아요. 나는 완성된 작품들보다,  작업이 이루어지게  전후 맥락과 작업의 과정, 무엇보다도 그것을 관통하는 작가의 내면에 가장 매력을 느낍니다.



일레인&빌렘드쿠닝, 프랜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에바 헤세, 루이스 부르주아는 20 초반의 내가 별로 즐기지 못했던 작품들이었고, 오히려 조지아 오키프, 아그네스 마틴, 이브 클랭 처럼 형태나 색채가 선명한 회화들을 좋아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거친 유화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을 좋아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그들을 어설프게 모방하며 담배를 피던 또래 친구들 때문이었던  같아요. 한편으로는  가식적인 예술뽕이 혐오스러웠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안에도 허세 부리고픈 욕구가 치솟는  억누르는  고통스러워서 일종의 박탈감 같은  느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스무살은 진짜 철딱서니 없는 나이인데 그냥 애답게 허세  부릴 , 그랬으면 정신 건강이 지금보다는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드는데 아무튼 그때는 그랬어요. 내가 가질  없는 ,   없는 사람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사람들에게도 증명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같아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도 추의 미는 미가 아니라고 떠들고 다녔더랬죠.



그런데 돌고 돌아,  안의 추한 감정 찌꺼기들이 묵고 묵어서 남은 것들을 들여다 보기 시작할  쯤부터 내가 적극적으로 싫어했던 그림들이 다시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감각이 이해가   같았고, 특히 에바 헤세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들에서는 동족에게서 느끼는 동질감 같은  찾았던  같아요. 사람을 알고 그의 글을 읽으면 글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어려워지는 것처럼, 작품을 통해 날카롭게 와닿는 작가의 무언가를 먼저 느끼게 되니까(느낀다고 착각을 하게 되니까) 작품 하나 하나에 대한 /불호가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이 너무 알고 싶은데 조각    점이 좋고 나쁘고를 따져서 무엇하겠어요.    점을 이어서 그들의 내면을 가늠해보기도 바쁜데요.



지금은 프랜시스 베이컨을 정말 좋아하고, 시간을 거슬러 고야 그림들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에바 헤세와 부르주아에게는 훨씬 각별한 애정을 느끼는데 그건 아마 이들이 훨씬 사적인 고통에 대해 명료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고통 일반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사리처럼 맺힌 구체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특히 헤세의 드로잉과 토막글로 공유되고 있는 몇몇 일기글들을 보면 열심히 손톱 거스러미를 피가 나도록 뜯고 있는  모습을 투영하게 됩니다. (감히 그렇게 재능 넘쳤던 작가와 어떻게 본인을 동일선상에 놓겠느냐는 밑밥 깔기는 생략하겠습니다. 부끄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것도 아니니까요.) 내가 20 넘게 거스러미를 신나게 뜯어대는 이유이 대해 엄마는 우울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아빠는 의지박약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아닌  같아요. 나는 내가 거스러미를 뜯을   뜯는지 매번 명확히 알거든요.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지 너무 불안해서 뜯어요. 지금은 의식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은 훨씬 덜한데, 여전히 피가 나도록 뜯는  보면 마음 한켠에서 백색왜성처럼 엄청난 중력을 발휘하고 있는  수도 있겠네요. 특히나 요즘에는 나를 자꾸 드러내고 표현하려는 욕구에 충실하다 보니  그런  같습니다. 비록 표현 수단은 헤세와는 전혀 달리, 고작 인스타그램 사진, 낙서, 셀카 정도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내게는 큰일이거든요.



그런데 에바 헤세의 일기 토막글들과  르윗이 헤세에게  편지를 오늘 읽으면서 동질감에서 오는 연민 같은  느꼈습니다. 헤세 같은 작가들의 재능은 규범을 파괴하고 직접 감각적으로 소통하는 것에 있는데, 정작 헤세의 내면은 규범파괴자가 되기에는 너무 여려서 문턱을 괴고 서서 손가락 거스러미를 뜯고 있는  같았어요. 일기에는 수도 없이 ‘나는  거야, 나와 작업들을 보이지 않게 가두고 있는 금을 밟고 틀을  거야라고 다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과 자신의 작업물들을 규범수호자의 관점에서 혐오스러워 하길 반복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헤세의 짧디 짦은 작가로서의 삶은 충동과 자기혐오 사이의 격렬한 작두타기로 불살라졌던  같아요.  르윗의 편지에서도 그런 헤세의 내적 고통을 염려하는 말과 함께 ‘learn how to say fuck you to the world’라는 애정 어린 충고와 ‘Do!!’라는 조언이 후크송 가사처럼 쓰여져 있었습니다. ( 르윗의 틴스피릿 다이어리 감성이 너무 의외여서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메커니즘으로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글들을 읽으면서 정말  위안을 얻었고 낙서도 하고 노래도 신나게 들은 후에 코딩 공부와 녹취 작업 진도도 만족스럽게   있었어요. 뭔가 주기적으로 정신적 변비 같은  겪는 건가 싶기도 하네요. 에바 헤세는... 나의 변비약...?





요지는... 일기에 요지가 있어야  이유는 없긴 하지만, 굳이 하나 찾자면 지르고 혐오하고 지르고 혐오하는, 스스로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정말 짜증난다는 , 나는 매번  작두타기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착각하는데 사이클이 되돌아오면  착각임을 깨닫는다는 , 그리고 그게 나만 그런  아니구나 생각할 때마다 작고 크게 위안을 얻는다는  정도가 되겠네요. 그냥 온갖 것을 철딱서니 없이 재밌게 즐기는  같다가도 갑자기 엄청난 후폭풍과 함께 자기혐오에 시달리기도 하는, 소심하고 찌질한 인간이라는 고백을 하고 싶었습니다.  글들도, 그림들, 사진들, 기타 배설물들이 어떨 때는 너무 좋은데 어떨 때는 꼴도 보기 싫고, 그것들에 대해 아는 사람들조차도  피하고 싶어지는 빻은 심보를 혼자라도 고백하고 싶었슴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낳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