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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 박하림 Sep 08. 2020

위안을 주는 사람은

피하고 보는 편이었습니다.






사실 우울증과 adhd 콤보가 그리 희귀한 건 아닙니다. 진단을 받지 않았을 뿐이지, 나와 유사한 증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꽤 여러 명 보았습니다. 이들이 각자의 고충을 대하는 태도는 대체로 둘로 나뉘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아픈 사람이니까 다들 날 배려해줘야 해’라는 마음과 ‘나는 아픈 사람이니까 민폐 안 끼치게 숨어 있어야 해’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사실 이 두 마음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니 대다수이기는 했어요. 민폐 안 끼치도록 최선을 다해도 골방에 틀어박혀 지내지 않는 한 다른 이들에에 신세를 져야 하는 상황은 늘 발생하게 마련이니까요. 타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먼저 패닉부터 합니다. 그리고는 그 패닉을 극복하기 위해 정당화 논리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나는 아프니까 사람들이 날 배려해줘야 해’라는 내용으로 정리됩니다. 여기서 더 완벽주의적인 사람이라면 타인의 배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죠. 그리고는 자기연민에 갇혀 더더욱 깊은 우울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내가 그 내면을 이렇게 소상히 쓸 수 있는 것은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adhd들은, 특히 과잉행동이 두드러지는 아이들은 특히나 ‘넌 나쁜 아이야, 넌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어’와 같은 말을 자주 듣고 자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들도 그 같은 비난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잘못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훈육은 특정 행동을 꾸짖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 사고 방식에 관여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adhd들은본인이 숨만 쉬어도 남에게 피해를 끼친다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니 강박적으로 타인에게 민폐가 되는 상황을 기피하려는 성향을 갖게 되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끊임 없이 밀어내고, 가면을 쓰고, 잠수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마법에 걸린 개구리 왕자가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독 이처럼 고립되고 침울한 이들에게 매력을 느끼고, 자신의 힘으로 이들을 절망에서 길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 같아요. 그러니 내게는 그런 이들이야 말로 기피 최우선 순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누구도 타인의 구원지가 될 수는 없으리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가장 비극적인 결말은 ‘구원’을 시도할 때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구원이란 대개 손을 뻗을 준비가 되지 않은 이를 통째로 건져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절망으로부터 통째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인간사의 모든 문제, 인격의 성장과 파멸,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역사, 철학적 문제제기들은 모두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구원할 수 있을 뿐이며,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근본 조건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나는 섣불리 큰소리 치지 않는 사람들과 주로 연이

닿았습니다. 나를 아껴준 사람들은 더 많은 걸 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개인주의적인 사람만 만나느냐고 뭐라 하기도 했어요. 처음에는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차라리 연애사에 대해 그다지 입을 열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연애라는 건 나와 상대방만의 문제이고, 그래야 하니까요. 난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좋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언제 파산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백지수표를 건네는 것보다 알뜰살뜰 마음을 모아 귀여운 돼지저금통 하나를 건네는 편이 편안하고 고마웠습니다. 나의 문제는 내가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의 문제에 대해 내가 조언을 구하지도 않았는데 섣불리 훈계를 하거나 불만스러워 하지 않는 것이 가장 로맨틱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조금 다른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어쩌면

나도 도움을 구할 줄 알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상대방이 도와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나의 문제를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손을 잡아 달라고 먼저 뻗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걸 배울 때 나는 비로소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구원을 기대하지는 않지만 같은 뜻을 품는 건 기대해볼 만 하지 않을까, 요즘엔 그런 희망을 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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