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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연 Mar 06. 2021

나는 미녀와 야수

  


한 달 전 우리 요양원에 들어온 이금오(가명) 어르신은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구순을 넘긴 고령임에도 생기가 있어 보이고, 말도 조리 있게 잘하며, 기억력도 비교적 또렷했다. 

그녀는 당신이 젊을 때 돈도 많이 벌었고, 집안에 고급 공무원도 있으므로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라고 은근히 자랑을 했다. 

전직 간호사였다는 그녀는 치매가 진행 중이긴 했으나 품위와 교양이 있어 보였다. 또한 겉으로 보기에 의사소통이 충분히 가능했으므로 큰 문제없이 수월할 거라는 게 사무실 사람들의 전언이었다. 최근에 등급 판정을 받고 바로 입소한 경우라서 그녀에 대해 전혀 정보가 없는 탓이기도 했다.


처음 요양원에 입소한 어르신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의 과정은 무난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무엇보다 가족과 떨어져 있는 낯선 환경이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인지가 있는 분들은 가족이 자신을 이상한 곳에 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랜 시간 울분을 터뜨리기도 하고, 집으로 보내 달라고 날마다 사정을 하거나 불같이 화를 내면서 가족을 원망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곧 요양원 생활에 젖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견디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녀는 들어온 첫날, 요양보호사들과 인사를 나누고 잠시 자기 자랑을 한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태도는 얌전했고 부탁하는 말도 조용조용해서 말썽 한 번 부릴 것 같지 않았다. 긴장했던 요양보호사들도 그날 밤 의외로 잘 자는 그녀를 보고 안심했다. 


그러나 예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사건은 다음날 밤부터 터졌다. 그녀는 밤새 한숨도 자지 않았다. 그리고 새벽에 딸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다. 요구 사항을 바로 들어주지 않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냐며 경찰서에 고발한다는 얘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악을 써대는 통에 잠자는 다른 어르신들을 다 깨웠다. 아무리 달래고 설득을 하려 해도 막무가내로 소용이 없었다. 마치 한풀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밤새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가슴속 깊이 숨겨왔던 울분을 그렇게 한바탕 표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의 처방전을 받기 전이라 그녀에게 함부로 안정제를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일주일 가까이나 낮에는 한없이 얌전하게 있다가도 밤만 되면 소리를 마구 질러대다가 새벽에야 겨우 지쳐서 잠드는 일을 반복했다. 야간 근무 탓에 안 그래도 피로가 잔뜩 쌓여 있는 우리로서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를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그녀가 낮에는 자신이 밤에 난동을 피운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얘기를 듣고 나서 우리에게 몹시 미안해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이 그런 일을 했다는 것에 절망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더 이상 살아서 민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쩌지?”

라는 그녀의 말이 한없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 그녀는 예전처럼 밤새 소리를 지르거나 난동을 피우지는 않는다. 보호자의 동의를 얻은 처방전을 받아서 취침 약을 복용하고 있으므로 상태는 안정되었다. 오히려 하루하루 기력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 될 정도다.

 ‘약’은 편리하지만, 어르신들을 정말 놀랍도록 빠르게 그리고 무섭게 지배한다. 


그녀는 낮에는 휠체어에 앉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느라 다리가 늘 퉁퉁 부어 있고, 밤에도 다른 어르신들보다 늦게 잠자리에 든다. 낙상 위험이 매우 높은 그녀를 일찍 침대에 눕혔다가 소리도 없이 복도에까지 걸어 나온 적이 몇 번이나 있어서 너무 놀랐던 탓에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가장 위험한 낙상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운신의 폭을 최대한 좁히려는 어쩔 수 없는 모양새인 게 사실이다. 일 대 일 전담 요양보호사라도 있다면 모르지만 언제나 일손이 부족한 요양원으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만으로는 일할 수 없는 요양원의 환경이, 때로는 사람을 이토록 냉정하게 만드는 것 같아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 이 또한 구차한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그래도 그녀가 하루하루 우리를 믿고 따라 주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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