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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Dec 07. 2023

세 달 살이

집이라는 한 글자 (24)

늦은 밤 식탁에 마주 앉았다. 피로가 어깨부터 발목까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으나 마지막 작업을 마쳐야 했다.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한 장의 서류. 내일이면 컨테이너에 실어 보낼 짐들의 항목과 가격을 기입해야 했다. 항목은 어떻게 채웠으나 가격 산정엔 머리를 싸맸다. 구매가격에서 1년이 지날 때마다 10%씩 감가한 금액을 기입하면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더듬더듬 칸을 채워나갔다. 선적과 기나긴 항해, 하역과 배달까지 혹시나 파손이나 분실이 일어날 경우, 이 서류를 근거로 보상해 준다고 하니 허투루 쓰기도 어려웠다. 펜을 내려놓고 나니 1시가 훌쩍 넘어있었다. 함께 산 지 11년, 그 시간이 한 장의 서류로 남았다.


짐을 떠나보내고 이틀 후면 집도 비워줘야 했다. 나와 꼬마의 출국은 3개월 뒤. 우리가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일단 짐을 추려내는 것부터 만만치 않았다. 매일같이 택배가 도착했다. 퇴근하면 문을 막고 선 박스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박스를 뜯고 비닐을 헤집어 내용물을 분류했다. 그러는 틈틈이 세 달 동안 필요한 물건들이 섞여들지 않도록 신경도 써야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건들은 사소하다. 그러나 모아놓으면 거대한 무리를 이룬다. 스프레드시트를 열어놓고 준비물들을 꾸렸다. 하필이면 제일 추운 계절을 보내야 한다. 비상약부터 시작해 수저와 그릇도. 양말과 속옷, 패딩도. 다리미와 다리미판도. 손톱깎이와 면봉, 샴푸와 바디워시도. 그건 여행 가방을 꾸리는 것과 비슷하지만 또 많이 달랐다.  


즉, 11월은 무엇 무엇해야 한다의 연속이었다. 종종 지푸라기 한 오라기에 무너지는 당나귀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출근은 어찌하고 일은 어떻게 했는지. 그 와중에 건강검진은 짬내어 어떻게 받았는지. 자꾸만 몰아닥치는 긴박한 사건들에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나는 검진 대기실에 오래 붙잡혀 있기도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소변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도무지 종이컵을 채울 수 없어서.


조용한 병원 화장실, 이름 적힌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린다. 출근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려볼수록 더 다급해지는 마음. 칸 안에 홀로 앉아 유튜브로 '물소리'를 검색해 본 적 있는지. '백색소음 4시간 연속재생'이란 썸네일에 두근거려 본 적 있는지. 이런 건 꼬마의 아기시절 낮잠용으로나 트는 줄 알았는데.


어째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가을을 넘겼네, 싶었는데 마침 이삿날에 맞춰 감기에 걸리고 만 꼬마다. 다행히 열은 없어 콧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어린이집 등원을 해야 하는 꼬마. 그 정신없는 공백들은 이틀 전에 물어봤음에도 헐레벌떡 달려와준 엄마가 채워주었다. 느지막이 퇴근해 돌아오니 텅 빈 집은 구석구석 말끔했다. 엄마는 휑한 바닥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굴러다니는 묵은 먼지들까지 청소하느라 기진맥진해졌다며 '나도 이제 할매 다 됐네.'라고 했다.

오래토록 가꿔온 나무들은 소중한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수납상자에 화분을 고이 담고 쿠션과 담요로 빈 공간을 채워주었다. 그걸 조수석 바닥에 놓고 한밤의 충무로로 향했다. 커브를 돌 때마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날 때마다 마음을 졸였다. 무사히 배송을 마치고서 돌아오는 길엔 진눈깨비가 내렸다. 레몬나무야, 다음에 만날 때까지 잘 지내야 해. 네가 책방에 잘 어울렸으면 좋겠어. 진심을 담아 작별인사했다.


세 달 살이를 하게 될 집은 h 언니의 형부가 구해주었다. 우리가 구하려는 동네-꼬마의 어린이집 근처-에서 부동산 사무실을 하고 있어서였다. 사는 게 바빠 만난 지도 까마득해진 언니건만 이러저러한 내 부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들어준 언니. 형부를 채근해 수수료도 반으로 깎았다는 언니. 역시 h 언니다웠다. 언니는 언제나 내게 좋은 것을 주는 사람이니까. 홀로 긴 여행을 떠날 땐 여행용 욕실파우치를 선물해 줬다. (13년 지난 지금까지 쓰고 있다) 망향비빔국수와 폴앤폴리나 같은 것도 먹여주고, 아베다 브러쉬와 opi 네일폴리쉬도 알려준 언니다. 그걸 챙겨 떠난 길고 짧은 여행마다 총무와 통역을 도맡아주기도 했다. 야심한 밤, 객실 수화기를 들고 자연스럽게 룸서비스를 주문하는 언니는 얼마나 멋있었는지.

언니는 형부 편에 장난감들도 바리바리 들려 보냈다. 그 덕에 꼬마는 새로운 집에 쉽게 정 붙일 수 있었고, 나도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가까운 마트와 놀이터의 위치를 파악하고, 하원길 들릴 만한 곳도 알아둔다. 처음 맞은 토요일엔 다같이 도서관에 들러 대출증을 만들었다. 꼬마 책 4권, 내 책 4권, 달 책 1권을 빌려 사이좋게 돌아온다. 시시각각 밀려드는 고난 사이, 사이가 좋지 않을 때도 많았지만 어쨌거나 여기까지 이르렀다. 새로운 동네에서의 세 달 살이, 한파가 잠잠해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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