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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Jan 31. 2024

아주 오래된 고장

겨울날의 경주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시기를 관통할 때면 그 누구도 절대로 일기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꼬박꼬박 일기를 쓰던 사람들조차 그런 때가 되면 도저히 글로 적지 못하고 움찔거린다. 이 얼마나 큰 손실인가. 개인사를 진솔하게 적어나가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하니 말이다. 일기의 가장 소중한 가치는 힘든 시절을 기록하는 데에 있다. 한 사람의 진짜 성격을 이루는 약점과 변덕, 부끄러운 증오심, 사소한 거짓말, 이기적 의도 등등. 이걸 행동으로 옮겼든 아니든 겁이 나 기록하지 못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문장이 마음에 콕 박힌 채 보낸 1월이었다. 내가 바로 그러했다. 마음에 맴돌고 차오르는 무언가를 어디에 짧게라도 남기지 못했다. 많이 허우적거렸고 몹시 비틀거렸다. 애먼 마음을 삭히고자 책을 읽었다. 흘러간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뜨개질을 했다. 그렇게 완성한 뜨개가방이 무려 다섯 개다. '오늘로써 너에 대한 불만을 쓴 노트가 열 권에 이르렀어.'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의 대사가 떠올랐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사이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엄마가 사고에 휘말렸다. 아니 사고를 쳤다고 해야 할까. 가치 판단의 정도가 다른 이 두 문장에서 나는 두 번째를 택하고 싶다. 그만큼 엄마를 탓하고 싶고 책잡고 싶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선택을 한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목숨이 오고 가는 일은 아니었으나, 가히 인생을 위태롭게 만들 만한 일이었다. 우리의 관계 역시 그랬다. 나는 소리치는 대신 조용히 연락을 끊었다. 이건 옳은 일인가? 지금이라도, 나라도 나서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을까? 여러 마음으로 갈팡질팡했다.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여전히 수렁에 빠진 상태다.


아마 영향이 없진 않았을 거다. 어느 날 오후 갑작스러운 통증이 찾아왔다. 그러더니 열이 무섭게 오르기 시작했다. 해열제를 먹어도 여전히 머리가 뜨거웠다. 병원을 찾아 약을 타왔음에도 목이 아팠다. 숨을 쉴 때마다 얇고 긴 칼로 목을 쑤시는 듯했다. 다시 찾은 병원에서 A형 독감 판정을 받았다. 처방받은 약을 한 움큼 털어 넣고 이젠 통증보다 걱정에 시달렸다. 꼬마는? 꼬마가 걸리면 어쩌지?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서울 하늘 아래 단둘이, 아주 꼭 붙어 지내는 사이니까. 같이 밥술을 뜨고 함께 목욕을 한다. 같은 침대에 누워 열심히 치대다 잠이 든다. 이렇게 상태가 안 좋은데 꼬마 병수발은 어찌 드나, 마스크 안 숨이 밭았다.


천만다행으로 꼬마는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지난 가을 꼬마가 맞은 독감백신의 효능을 그제야 실감했다. 다만 뒤늦게 코감기에 걸려 콧물을 주룩주룩 흘려댔다. 이리저리 코를 닦는 탓에 양 볼이 벌겋게 트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정말 다행인 거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다. 우리는 작은 캐리어에 2박 3일 치의 짐을 챙긴다.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다. 경주역에는 아빠가 마중 나와 있다. 꼬마는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 앞에서 잠시 낯을 가리다 이내 신이 나서 헤헤거린다. 호텔로 가는 길, 차창 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능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능은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능이 모여 이루는 능선. 지도를 보니 대릉원이다. 아빠! 저것 봐! 나는 어떤 시절로 되돌아간다.

차가 신호에 걸린 사이 아빠가 말한다. 옛날에 너랑 동생이랑 아빠랑 셋이서 경주 왔잖아. 응? 언제? 기억이 안 나는데. 왜, 너 취업하고 나서 연수받기 전에 왔는데. 그랬었나? 도통 나지 않던 기억은 다음날 국립경주박물관에 이르러서야 차곡차곡 되살아난다. 박물관 뜰에 선 에밀레종 앞에서. 그때도 지금처럼 스피커로 종소리를 틀어주고 있었다. 771년에 만들었다는 종이 지금 눈앞에 있다.

박물관에서 몸을 비비 틀던 꼬마는 금관과 금팔찌, 금귀걸이 앞에서 잠시 흥미를 보인다. 나중에 말하길 제일 좋았던 것은 색깔 유리잔이라고. 나 역시 그랬다. 아마도 서역에서 흘러왔을 귀한 유리잔들은 지금 보아도 무척 세련된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조각조각 이어 붙인 자국마저도 아름다웠다. 아빠는 무엇이 가장 좋았을까. 꼬마랑 함께 보낸 시간들이겠지. 둘은 조식부페에서 가져온 귤을 나눠먹고, 박물관 뒷마당에서 달리기를 했다. 오후 내도록 수영을 하고 저녁을 잔뜩 먹고 난 뒤에도 오징어땅콩 과자를 먹었다. 아빠는 보문호숫가를 산책하는 동안 걷는 길의 절반 이상 목마를 태웠다. 우리의 일정은 느긋하고 한가로웠다. 아빠도 나도 엄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그래서 잔잔하게 행복할 수 있었다.

아빠는 기차에 올라 짐을 실어주었다. 곧 기차가 떠나려는 참에 인사는 길지 않았다. 손도 채 못 흔들고 헤어진 후, 나는 조용히 훌쩍거렸다. 꼬마는 내 눈물의 이유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묻지 않았다. 헤어짐이 이렇게 실감 나는 것은 곧 우리가 오래 떨어지기 때문이다. 간밤, 내 수다는 계절을 옮겨 다녔다. 아빠는 언제쯤이 좋아? 봄이 좋을까? 가을이 좋을까? 여름엔 너무 복잡하겠지? 겨울은 날씨가 안 좋다고 하니까 빼고. 아빠는 늘 그렇듯 다 좋지 뭐, 라고 답했다. 아빠의 눈썹이 희끗희끗했다. 돌아오면 꼬마는 아홉 살, 아빠는 일흔 살이 된다. 그때는 목마 태워주기 너무 힘들겠지. 엄청 빠르게! 외치는 꼬마의 튜브를 힘차게 끌어주기도 어려울 것 같고. 여러 마음이 오고 갔다. 나는 새삼 깨닫는다. 나는 아빠를 많이 사랑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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