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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 Feb 29. 2024

코코넛에서 석류까지

나트랑 마지막날

날마다 커피로 각성하고 맥주로 이완한다. 감자칩을 종류별로 사들여 팡팡 뜯는다. 거실의 큰 식탁에 모여 앉아 질리지 않도록 수다를 떤다. 늦은 밤 이러고 있으니 농활 생각나네, 나는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모든 세대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이념은 희미해지고 내 신념은 더욱 가느다란데 나는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나. 그저 새참으로 마시는 막걸리 맛이 너무 좋고, 피 뽑으러 들어간 논의 뻘이 다리를 쭈욱 삼키던 기억만 난다. 허리를 굽혔다 펴며 전진하는 사이 누군가 익숙한 후크송의 한 대목을 뽑아 올리면 그게 돌림노래가 되어 논밭에 번져갔다. 그러면 고된 일이 고되지가 않네. 이게 바로 노동요구나! 깨달음이 내려 꽂히는 순간.

시간이 늦도록 놀다가도 아침이면 재깍 눈이 떠졌다. 대강 씻고서 아침 요가를 하러 간다. 제일 첫 타임의 조깅은 차마 도전하지 못해도 요가 정도는 할 수 있다. 몸을 폈다 말았다 하는 사이 간밤의 피로가 가시고, 그렇게 급조한 몸으로 다시금 아침 커피를 들이켠다. 노닥노닥 너무 좋아. 오전 나절 수영장에서 물장구를 치는 사이 몸은 무섭게 그을린다. 수영 못한다는 d에게 수경 하나 씌우고 자맥질 강습을 시키는 친구들. 그래! 그렇게 하면 돼, 잘하는데? 칭찬과 수영장물을 양 볼에 머금고 d는 천천히 전진한다. j는 해변에서 유유자적 책을 읽는다. y는 바다를 바라보며 멍을 때린다. 그러다가도 다 같이 모여 타이머를 맞춰두고 하나 둘 셋! 점프하는 사진을 남긴다. 아무리 잘 타는 타입이라지만 너무하다. 사진 속 나는 수상구조요원이 따로 없다.


놀이동산과 워터파크와 사파리가 함께라는 유원지(너무도 옛말인데 찰떡같이 붙는다)를 돌아보며 유자식 무리들은 잠시 고국에 두고 온 자식 상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시원하게 이는 바람에 그 상념은 멀리 날아간다. 하루 일정의 마지막은 마사지로 씻어내고, 마지막의 마지막은 역시나 맥주 한 잔에 수다 떨기다. 너무 날 것의 얼굴로 마주 앉아 맥주를 펑펑 마신다. 그러다 보면 속에 든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가파른 호흡으로 지나온 몇 달을 이야기하는데, 친구들이 말을 거든다. 너는 남에겐 되게 관대한데 스스로를 너무 옭아매는 것 같아. 많이 다그치고 채찍질하는 느낌? 그래서 그런가 요즘 살도 너무 빠진 것 같고. 그런 말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돈다.


20년을 봐 온 사이이니 임상은 충분하다. 친구들이 하는 말에 틀린 것은 없다. 급작스레 살이 내린 것도 맞고, 그게 빠듯하고 촉박하게 삶을 꾸리느라 그런 것도 맞다. 실수 없이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 효율적으로 열심히. 내가 걱정하는 건 그 강퍅함이 고착화되어 나의 성정이 되고, 그러다 나를 넘어 타인을 겨눌까 봐 그게 두렵다. 그 마음을 알아봐 주니 눈물이 날 수밖에.

자리를 파한 건 새벽 네 시였다. 몇 시간 눈 붙이고 나니 아침이 밝았다. 요가를 다녀와 급조한 기운을 불어넣고, 조식으로 그 기운을 부풀린다. 오늘은 마지막날. 무얼 할까 고민하다 d와 함께 나트랑 시내를 쏘다녔다. 중심가에서 몇 블럭만 떨어져도 거리의 풍경이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가격이 달라졌다. 현지인들이 다니는 가게는 일단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았고, 그래서 서로 손짓발짓을 하다 번역기를 켠다. 머리 감기, 두피와 목, 어깨, 얼굴 마사지, 트리트먼트 등이 포함된 헤드스파의 가격은 한 시간에 99,000동. 그러니 오천 원 남짓이다. d와 나는 웃통 까고 헤드스파 전용 베드에 누워 슬슬 녹아내린다. 나 이거 너무 해보고 싶었어. 흐느적거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너랑 꼭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겨우 방점을 찍는 이성.

지나치게 찰랑이는 머리를 하고 골목의 숨은 까페에서 코코넛커피스무디를 또 마신다. 진짜 마지막 마사지를 받고, 반미를 소중히 품에 안고 공항으로 향한다. 꼭 사이공 맥주를 마셔야겠어. 이럴 때 집요해지는 나. 공항 매점에서 산 맥주와 반미로 마지막 저녁을 먹는다. 마지막, 마지막. 마지막의 마지막. 살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면세점에서 두 배 가격을 주고 코코넛믹스커피를 산다. 그럴 거면 시장에서 사지 그랬냐? 핀잔에 고개만 끄덕인다. 친구들의 가방엔 망고젤리와 스트랩실이 가득하다. 라탄 가방에 크록스에 지비츠에 나이키 쇼츠와 붙이는 파스도. 보따리장수 여섯에 코코넛커피장수 하나. 우리는 그렇게 서울로 향한다. 비행기에선 그대로 기절했다가 길가에 쌓인 눈을 보니 순간 현실로 돌아온다.  

어디 마음에 흡족한 것만 있었겠냐만. 서운하거나 아쉬운 마음들도 있었겠지만. 밤 산책에 나서 별자리를 찾아가며 탄성을 지르던 것은 잊지 못한다. 누군가 저기 봐! 하고 가리키면 따라서 고개를 젖히느라 열 걸음을 한 걸음처럼 걷던 친구들. 서로 다른 면과 같은 면을 찾아 이리저리 맞춰대고 나누느라 밤이 그리 길었다. 시시콜콜한 추억들이 그렇게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이렇게 다른 우리가 모여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지난 20년을 기리며, 또 앞으로의 시간을 상상하며 바라는 것은 그저 친구들의 안녕이다. 다들 건강들 하시고 그래야 언젠가 다시 갈 수 있을 테니까. 우선은 갱년기 전에 가야 하지 않겠니? 얘들아, 석류 먹자. 많이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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